《“어떤 다른 질문도 이처럼 열정적으로 논의되지 않았고, 어떤 다른 질문을 위해서도 그렇게 많은 귀중한 피와 통렬한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어떤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플라톤에서 칸트까지-그처럼 아주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질문은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인간은 결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고 오히려 좀 더 나은 질문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라는 체념적인 지혜가 필요한 질문 중 하나”라고 말한다. 법철학자인 그는 약 50쪽 분량의 짧은 논문을 통해 정의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를 종합, 요약해 소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저자는 정의를 ‘이익 또는 가치충돌의 해결 문제로서의 정의’와 ‘인간행동의 정당성으로서의 정의’로 나눈다. 사람들은 이익이나 가치가 충돌할 때 무엇이 더 정당한가, 정의에 부합하는가를 따진다. 결국 이때의 정의는 갈등이 생길 때 이를 해결할 만한 정당한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당한 질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사회 속에서 인간을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의다. 저자는 “정의란 사회적 행복이고 사회질서가 보장하는 행복”이라고 답한다. 이 경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될 수 있다.
문제는 한 사람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과 상충될 때다. 공리주의 철학자인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정의로 봤다. 그러나 행복이 주관적 가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벤담의 논의는 실질적으로 적용되기 힘들다. 저자는 “정의에 대한 욕구는 자기의 주관적 행복에 대한 불멸의 욕구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최고가치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최고가치의 후보로 드는 것은 개인의 생명, 국가의 이익, 개인의 자유, 경제적 안전, 진실성 또는 인간성 등이다.
정의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가치는 상충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은 각 집단 내, 특정한 경제적 조건하에서 서로에게 미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가치체계 역시 어느 정도 일치한다. 특히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은 이 같은 경향을 강화한다.
저자는 이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정의론을 탐구한다. 또한 자연법 이론과 정의 개념의 관계를 탐구하며 정의에 있어서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비교한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 앞의 평등’ 등 정의에 관한 여러 명제를 논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명제는 각자가 그의 것으로 간주해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식이다.
이 같은 논의를 통해 저자의 결론은 도입부 “인간은 결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로 돌아간다. “나는 상대적 정의로 만족해야만 하고 내게 있어 정의가 무엇인지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답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명쾌히 답하는 대신 읽는 이에게 자기 자신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자신에 있어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답한다.
“학문은 나의 직업이고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학문, 그리고 학문과 함께 진리와 정직이 번창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그 정의를 말한다. 그것은 자유의 정의, 평화의 정의, 민주주의의 정의, 관용의 정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