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취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을 잊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세 갈래 이야기로 풍자한 ‘아침드라마’. 사진 제공 극단 골목길
“TV드라마가 다 그렇지 뭐. 도대체 드라마에서 뭘 기대하는데.”
가끔 아침드라마를 보면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돌아오는 아내의 지청구다. 그렇다. 이제 TV드라마를 보면서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철지난 레코드판을 틀어대는 것과 같다. TV드라마는 이제 더는 현실의 축도가 아니다. 대중의 비현실적 욕망이 투영되는 환상 스크린이다.
드라마에서 해피엔딩은 이제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당위의 문제다. 그걸 위반하는 작가, 연출가는 저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거나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철부지 예술지상주의자다.
오늘날 아침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종교적인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그 반복적인 의식에선 꼭 외워야 할 주문이 있다. “콩트는 콩트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예능프로그램의 구호를 변형한 무소불위의 주문.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과 혼동하지 말자.”
극단 골목길의 창작극 ‘아침드라마’(박근형 작·연출)는 바로 이 주문에 딴죽을 건다. 드라마보다 더 기막힌 게 현실 아니냐고. 아침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당신의 삶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으냐고. 그런데 왜 드라마에 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않느냐고.
연극은 세 갈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부모의 복수를 위해 길을 나선 소녀에 대한 기괴한 신화(5분)와 전형적인 아침드라마를 닮은 ‘구름나라 천국 위 가족의 이야기’(10분) 그리고 연쇄방화범에 의해 가정이 파괴된 ‘우리 동네 가족의 이야기’(60분)다.
신화는 가족의 해체로 자기의 벗어난 운명을 되돌려놓으려다가 결국 그것을 되풀이하고 마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아침드라마를 닮은 이야기는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추락한 한 가정의 외동딸의 맹랑한 신데렐라 이야기로 헛웃음을 유발한다.
두 이야기는 허무맹랑해 보일지언정 집요함에 가까울 정도의 일관성을 지닌다. ‘우리 동네 가족의 이야기’에선 그런 일관성을 찾기 어렵다. 주인공 남자(박완규)는 술좌석에서 만난 동창과 연쇄방화범의 잔혹한 범죄행각을 얘기하거나 서로의 가족사를 흉허물 없이 털어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상 전혀 모르던 사이임이 드러난다. 그들의 불완전한 기억이 서로 몸을 섞으면서 기상천외의 촌극을 빚어낸 것이다. 그 순간 남자는 혼돈에 빠진다. 자신의 이름이 친구가 기억하는 창식인지 아니면 자신이 기억하는 정우인지.
정체성의 혼란은 계속된다. 그는 자신을 염치를 아는 채권자라고 믿고 있다가 사실은 뻔뻔한 채무자임을 발견한다. 또 남의 집 이야기로만 흘려듣던 연쇄방화범의 희생양이 바로 자기 가족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연쇄방화사건에 희생된 아들(김주완)의 영혼은 그런 그에게 “아버지! 아버지는 여기 이 불길이 보이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아비는 “내가 뭘 모른 척한다는 거냐”라고 반문한다.
문득 트윈폴리오의 ‘행복한 아침’이 흘러나온다. ‘별은 잠이 들어요/꿈은 밤을 잊어요/멀리 종소리 들려오네/행복한 아침이 밝아 일어나서 창을 활짝 열면/저 하늘의 하얀 꿈이 서려 손짓하여 주는데…’ 연극의 말미 세 이야기를 들려주던 화자(서이숙)는 말한다. “여러분 다시 아침입니다 그만 일어나시죠. 어서 TV 앞에 앉아 오늘의 아침드라마 틀어보세요.”
여기서 연극의 의도한 바가 뚜렷해진다. 죽은 아들이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리는 프로이트 환자에 대한 라캉의 역설적 해석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가 아침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단순히 현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감춰둔 욕망이 실현되는 아침드라마를 보기 위해 우리의 부조리한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주인공의 온몸에 석유를 퍼붓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꿈속에서 깨어나도록 관객의 등짝을 후려치는 서슬 퍼런 죽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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