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자본가의 얼굴을 가진 공산주의 산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20일 03시 00분


◇ 엥겔스 평전
트리스트럼 헌트 지음·이광일 옮김680쪽·3만2000원·글항아리

1840년 스무 살 무렵 엥겔스를 그린 초상화. 당시 엥겔스는 ‘오스발트’라는 필명을 쓰며 과격파 혁명가를 자처했다. 사진 제공 글항아리
1840년 스무 살 무렵 엥겔스를 그린 초상화. 당시 엥겔스는 ‘오스발트’라는 필명을 쓰며 과격파 혁명가를 자처했다. 사진 제공 글항아리
스스로 공장을 경영하는 자본가였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를 배격하는 이론의 정립에 기여했다. 귀족들의 여우 사냥을 즐기며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의 일선에 섰다. 이 모순적 인물은 바로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후원자,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다.

젊은 역사학자인 저자는 최근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재평가에 엥겔스가 빠져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책은 19세기 정치, 사회, 경제상, 당대의 사상적 흐름을 풍부하게 녹여내며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엥겔스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한다.

○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엥겔스는 독일 라인란트 주 바르멘에서 태어났다. 직물공장이 빽빽이 들어선 가운데 공장주들의 저택이 솟아있는, 산업혁명 초기의 전형적인 소도시였다. 공장의 폐수와 매연으로 오염된 환경,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산업화의 단면이었다.

10대 후반 군대에 자원해 베를린으로 간 엥겔스는 군사훈련보다는 격렬한 철학 토론에 빠져들었다. 연병장 인근의 카페에서 이른바 ‘베를린 자유파’ 혹은 ‘맥주파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그는 당시 젊은이들을 휩쓸었던 헤겔의 사상은 물론이고, 헤겔을 비판하며 그가 말한 ‘정신’의 자리에 대신 인간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 포이어바흐를 탐독했다.

“오스발트(엥겔스의 필명)는 회색 프록코트에 후추색 바지를 입었다/속마음도 후추색, 산악당 오스발트는/뼛속까지 급진파라네.”

당시 동료였던 에드가 바우어가 엥겔스를 묘사한 시의 한 구절. 아들의 일탈을 걱정한 아버지는 군사훈련을 마친 엥겔스를 영국 맨체스터로 보낸다. 장사를 가르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엥겔스는 “공유재산에 토대한 사회혁명이야말로 일반 원칙에 부합하는 인류의 상태”라고 말할 정도로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변신해 있었다.

그런 엥겔스에게 당대 산업화의 정점이었던 맨체스터는 곧 자본주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시였다. 이곳에서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쓴다. 낮에는 자본가, 밤에는 공산주의자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던 엥겔스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그 이면에 있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함께 관찰해 책에 담을 수 있었다.

저자는 “후일 주류 마르크스 사상으로 여겨지는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은 엥겔스의 이 저서에서 이미 최초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이 무렵은 엥겔스가 마르크스가 편집장으로 있던 ‘라인신문’에 기사를 쓰면서 마르크스와 친분을 쌓은 시기이기도 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본격 의기투합한 곳은 혁명의 기운이 맴돌던 1840년대 후반 프랑스 파리였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 ‘제2 바이올린’이 되다

이때부터 엥겔스는 ‘제2 바이올린’을 자처하며 본격적으로 제1 바이올린, 마르크스의 절대적 후원자로 나선다. 1849년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 다시 가업에 나선 것은 오로지 런던에서 ‘자본론’을 집필하는 마르크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마르크스가 가정부와의 불륜으로 아들을 낳자 스캔들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삼을 정도로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헌신적이었다.

“실제가 그 어떤 이론보다 낫지. 그래서 자네가 회사를 어떻게 경영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좀 해주었으면 하네.”

이 시기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맨체스터에서 국제무역에 종사했던 엥겔스의 실질적 경험은 ‘자본론’의 토대가 됐다. 저자는 “엥겔스가 자본론에 한 기여는 통계 제공 정도를 넘어 마르크스의 경제 철학을 먼저 듣고 방향을 잡아주는 수준이었다”고 설명한다.

1869년,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에 시달리던 엥겔스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장사 일’을 그만둔다. 1870년 마르크스의 집에서 10분 거리의 집으로 이사한 엥겔스는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의 조언가이자 마르크스가 쓴 강령을 집행하는 실무자로 나선다. 1883년 3월 마르크스가 숨진 뒤에도 엥겔스는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에 몰두했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 역사학자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의 인본주의적 면모를 버리고 기계적 정치학으로 변질시켰다고 평가한다. 공산주의를 도그마로 만든 인물이 바로 엥겔스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를 수용할 경우 이후 스탈린과 같은 공산주의 독재자들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은 엥겔스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이 같은 평가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20세기에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 계열 정당들이 했듯이 소수의 전위대가 주도하는 ‘톱다운’ 방식의 혁명에 대해 엥겔스는 대단히 회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엥겔스 생전의 발언이 저자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마르크스의 사유방식 전체는 어떤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방법이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도그마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토대로 더 탐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이고 그런 탐색을 위한 방법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그(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소중한 풍요가 좀 더 공정한 시스템을 통해 분배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아직도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도그마가 아닌 ‘한 인물’로서 엥겔스를 다시 현대에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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