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깨사-음악이 흐르는 책 ‘노르딕 라운지’ 펴낸 작곡가 박성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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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6일 03시 00분


텍스트+음악 프로젝트, 대중음악 ‘판’ 키우다

《‘3월 어느 날, 핀란드 헬싱키.어제처럼 오늘도 천천히 길을 걷는다.잔뜩 흐린 하늘. 길가의 눈이 계절을 알려준다.3월이지만 이곳은 아직 겨울이다.발걸음이 향한 곳은 중앙 광장 근처의 디자인 디스트릭트. 패션과 인테리어 가게,갤러리, 박물관이 모여 있는 곳. 차례로 들르며 북유럽 특유의 감성을 즐기는 동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길모퉁이에 멈춰 선다.적당한 템포의 하우스 리듬 위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피아노 패턴이 떠오른다.휴대전화에 입을 대고 노래하듯 머릿속의 음표를 입력한다. 누가 들으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까 봐 전화를 하는 것처럼 소곤소곤 노래를 부른다.’》

작곡가 박성일 씨가 2일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책 ‘노르딕 라운지’를 펴 놓은 채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대중음악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체념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작곡가 박성일 씨가 2일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책 ‘노르딕 라운지’를 펴 놓은 채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대중음악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체념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대중음악 작곡가 박성일 씨(33)는 여행을 자주 다닌다. 하지만 3월 한 달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보낸 여행은 예전과 달랐다. ‘음악을 결합한 책’을 내는 프로젝트 차 떠난 여행이었다. 그는 현지인처럼 한 달을 보냈다. 시내의 작은 갤러리, 이름 없는 카페를 돌아다니며 떠오르는 악상을 즉석에서 곡으로 만들었다. 우선 휴대전화에 음을 입력한 뒤 그 기분이 사라지기 전 호텔방에서 작은 키보드로 곡을 완성했다. 디자인 디스트릭트에서 떠올린 악상은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라는 곡으로 만들었다. 몽환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사운드가 반복되는 곡이다. 그는 “헬싱키 거리에서 느낀, 코끝에 묻어오는 차가운 바람 냄새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최근 ‘노르딕 라운지’라는 책을 펴냈다. 그렇고 그런 여행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다른 시도가 눈에 띈다. 그가 현지에서 작곡한 곡들이 바코드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격자무늬의 2차원 코드인 QR(Quick Response)코드에 담겨 곳곳에 배치된 것.

스톡홀름의 노벨박물관을 둘러본 날 만든 ‘1914년 어느 과학자의 하루’, 경쾌한 여성 보컬에서 북유럽의 청명한 하늘이 연상되는 ‘콴도(Quando)’, 들뜬 분위기가 담긴 ‘트랩드 인 아요 바(Ahjo Bar)’ 등 아홉 곡 모두 라운지 음악이다. 호텔 라운지에서 흘러나오는 이지 리스닝 계열의 음악들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사면 음반까지 얻게 되는 셈이다.

박 씨는 “2년 전부터 음악을 책과 결합하는 방식을 찾다가 이런 형태로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CD를 책 뒤에 붙이는 것은 번들의 느낌이 들어 싫었다고 한다. 고민하는 동안 스마트폰이 대중화됐고 QR코드라는 도구가 등장했다.

그는 “특정 페이지에 QR코드를 배치함으로써 그 내용에 맞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점이 QR코드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번 책은 음악을 유통시키는 ‘새로운 판’을 개척해 보겠다는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소프라노 신문희 씨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에 삽입될 OST 작업을 하고 있는 박성일 씨(오른쪽).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소프라노 신문희 씨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에 삽입될 OST 작업을 하고 있는 박성일 씨(오른쪽).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그는 대중음악계에선 이미 이름을 알린 작곡가다. 계원예고 재학 시절인 1996년 우연한 계기로 그룹 마로니에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한 뒤 박효신 장나라 화요비 등에게 곡을 줬고, ‘햇빛 속으로’ ‘네 멋대로 해라’ ‘이 죽일 놈의 사랑’을 비롯해 ‘성균관 스캔들’까지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의 OST를 만들어 OST 작곡가로도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고 말한다. 음악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박 씨는 “음반 시장이 침체됐다고 움츠리고 있을 게 아니라 기존의 틀을 깨는 어떤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책은 계속 가지를 뻗어나갈 예정이다. 음악만 별도로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16일부터는 음원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작한다. 태블릿PC용 전자책으로도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애니메이션 전문가가 만든 비디오아트가 추가된다. 책과 음악에 이어 영상까지 합쳐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전자책은 영어, 일본어로 번역되고 있고 핀란드어 스웨덴어 번역도 추진 중이다. 박 씨는 “텍스트만 있다면 세계시장을 노리는 게 힘들지만 음악과 영상이 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고 자신했다. 그는 이 작업을 마무리하면 다른 나라로 시도를 넓혀갈 계획이다. 남미와 보사노바의 결합, 아프리카와 타악기의 결합 같은 구상을 하고 있다.

“한국의 음악시장은 비즈니스하는 사람들이 주도합니다. 그래서 상업성을 강조하다 보니 아이돌만 부각됐죠. 하지만 아이돌 말고는 없다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판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작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QR코드 같은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면 인디밴드들도 대중에게 얼마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예술대에서 ‘뮤직 비즈니스’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학생들에게 항상 ‘원 소스 멀티유스’를 염두에 두라고 강조한다고 했다.

배용준의 여행 에세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의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OST 작업을 맡은 그는 “단순히 다큐 한 편에 깔리는 OST가 아니라 독립적인 공연이 가능하도록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가수 장사익 씨, 소프라노 신문희 씨, 아이돌 그룹 ‘레인보우’ 등을 참여시켜 클래식 곡부터 민요, 발라드, 댄스 곡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했다.

그는 얼마 전에는 구두 디자이너, 마케팅 전문가, 시나리오 작가 등과 뜻을 모아 ‘구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 디자이너가 만든 구두에 스토리를 붙여 팔 계획이다. 구두에 맞는 음악도 만들기로 했다.

“어떤 형태로든 음악을 알리는 게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적으로 자꾸 줄어드는 대중음악의 ‘판’을 키우기 위해선 다양한 형태로 ‘판’을 다변화해야 합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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