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첵의 향기]옛 건물에 숨어 있는 ‘시대의 비밀’ 벗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1일 03시 00분


산과 산 연결선에 집 짓고… 사찰이 바다를 쳐다보고깵 의성 김씨 종택이 중국식 구조인 까닭은?

◇옛 사람의 발길을 따라가는 우리 건축 답사 1, 2 최종현 지음 1권 384쪽 2만2000원, 2권 344쪽 2만 원·현실문화

경북 안동시 묵계서원은 조선 연산군 때 사간(사간원의 종3품 관직)을 지낸 김계행이 세웠다. 그의 호는 보백당으로, 보백은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맑고 깨끗함뿐’이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현실문화
경북 안동시 묵계서원은 조선 연산군 때 사간(사간원의 종3품 관직)을 지낸 김계행이 세웠다. 그의 호는 보백당으로, 보백은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맑고 깨끗함뿐’이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현실문화
고려 충선왕 때 안렴사(각 도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지낸 안축은 관동지방을 여행하고 남긴 기행문 ‘관동와주(關東瓦注)’에서 강원 강릉 경포대를 ‘경색(景色)의 으뜸’이라고 표현했다. 경포대는 구조가 독특하다. 세 단으로 돼 있는데, 가장 낮은 층이 가장 넓고, 남쪽으로 두 번째로 넓고 높은 층이 있다. 좌우로는 가장 높은 마루 단이 있다. 벼슬아치들이 여기서 잔치를 할 때 원님은 두 번째로 높은 층에 앉아 가장 넓고 낮은 단에서 펼쳐지는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고, 자리 양쪽의 가장 높은 단에서 악공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었다. 이렇게 하면 춤을 감상하며 입체적인 음향을 즐길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풍류가 넘치는 광경이다.

이처럼 책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쉽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전통 건축물의 역사와 특징이 잘 정리돼 있다.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인 저자는 서문에서 “1960년대 말부터 진행된 새마을운동과 전국 여러 곳에 세워진 댐 때문에 귀중한 전통 취락과 주거 건축이 무차별하게 파괴되었다”며 “이런 점이 안타까워 1970∼1990년대까지 전국의 고건축을 사진에 담고 실측해 정리했다”고 밝힌다.

저자는 우선 옛 건축을 읽는 방법을 소개한다. 서양 건축에서는 정면성이 중요한데, 여기에는 ‘정면성은 사람이 마주 보는 정면에 지배적이고 중심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 정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람이 건축물과 분리돼 외부에서 건물을 대면해야 한다. 즉, 건축은 타자이자 객체가 되고 인간은 주체가 돼 서로 분리된다.

이에 비해 동양 건축은 어느 한 방향에 지배적이고 중심적인 지위나 가치를 부여한 예가 없다. 동양 건축에서는 건물의 중심과 그곳에서 본 사방 개념이 중요하다. 인간과 건축이 한 몸이 된 관계, 인간이 내부(중심)에 정재(正在)해 사방의 자연과 관계하는 구조다. 산이 사방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산은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이자 숭앙의 대상이 됐다. 여기에 나무를 숭상하는 숭목(崇木) 사상이 더해져 전통 건축 배치에 영향을 줬다. 산과 산봉우리가 마주 대하는 연결선 위에 건물이 배치됐다. 주변에 마주 보는 산이 없어서 연결선을 만들기 어려울 땐 산과 물을 축으로 한다든지, 그나마 물도 마땅치 않으면 나무를 심어서 산과 나무의 연결선에 건물을 배치했다. 평지에선 가장 중앙에 중심이 되는 건물이, 경사지에서는 위쪽에 가장 중요한 건물이 세워졌다.

저자는 조선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기호의 남한강 기행문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의 루트를 따라 서울에서 충북 단양, 경북 영주까지 전통 건축 순례에 나선다. 영주시 풍기향교는 평지에 있는데도 전통적인 일직선 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대성당은 약간 어긋나 있고, 대성전과 명륜당도 약간 엇물려 배치돼 있다. 사찰에서 향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고을 가까이에 절들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찰들이 향교로 바뀐 경우가 많았다. 풍기향교뿐 아니라 소수서원, 순흥향교도 옛 절터에 자리 잡았다. 권력의 주체가 바뀌면서 공간 이용의 주체가 바뀐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은 서향이 많다. 이상향인 서방정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출 풍광이 뛰어난 전남 여수시 향일암은 동향이다. 이유가 뭘까. 물론 바다를 향해 돌출된 섬 중에서 가장 끝, 벼랑 위에 있는 입지적 제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능가사, 금탑사 등 인근의 바다 쪽을 향한 다른 사찰을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사찰들은 해안의 동태를 살피는 척후(斥候) 기능을 하는 보(堡)나 성(城)의 역할을 겸했다. 이런 이유로 사찰들이 억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시대에도 남게 됐다. 금탑사는 고지도를 보면 인근에 진(鎭)이 있었고 봉화대도 남아 있다. 능가사에는 빠른 지름길을 통해 절과 인근의 진이 통하도록 돼 있다. 저자는 “다른 지방의 절들은 훼손되고 폐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지역 절들이 규모가 꽤 큰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북 안동시 의성 김씨 종택(보물 450호)은 중국식 평면 구조가 독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문을 들어서면 집의 정면이 보이는 것이 원칙인데, 이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집의 모서리가 보인다. 이런 구조에는 사연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이 집안이 모반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어사 박문수가 내려와 상황을 수습했다. 박문수가 와보니 종택의 규모가 엄청났다. 들어가는 쪽 연못부터 번듯한 사랑채와 안채 오른쪽의 재청에 이르기까지 으리으리한 규모였다. 박문수는 권세를 좀 작게 보이도록 하는 게 좋겠다며 집의 일부를 헐도록 조언했고, 이에 따라 집의 형태가 달라졌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글을 쓴 이유에 대해 밝힌다. “주심포 양식(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는 양식), 팔작지붕(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는 형태)을 외운다 해서 부석사 무량수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건축 양식에 집중하는 대신 그 양식을 태어나게 만든 시대를 바라보도록 한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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