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세 번째 확장팩인 ‘WOW:
대격변(Cataclysm)’에서 처음 선보인 고블린이라는 캐릭터. 아담한 체구에 지능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사진 제공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처음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시작한 건 올해 2월이었다. 2004년 말에 개발된 게임을 5년이 지나서야 처음 시작하게 된 셈이었다. 시작은 도대체 왜 12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온라인게임에 중독되는지에 대한 기사를 써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몇 달.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7월이 되자 이 게임의 최고 레벨인 80레벨에 이르렀다. 이후 게임의 핵심 스토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임무를 할 수 있게 됐고, 이를 이뤄가면서 흥미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때는 아마도 다시 이 게임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 게임을 즐기던 친구가 마침 당시에 직장을 옮기느라 접속이 뜸해졌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인생에는 게임보다 중요한 일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12월까지는.》 ○ 그들이 돌아왔다
블리자드는 2004년 말 게임을 처음 개발한 이후 2007년 초 ‘불타는 성전’, 2008년 말 ‘리치왕의 분노’ 등 2년마다 새로운 ‘업데이트’를 만들어냈다. 온라인게임은 업데이트가 진행되면 기존의 게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토리와 배경이 생겨나는 게 특징이다.
12월 9일. 새로운 업데이트가 나왔다. 이번 이름은 ‘대격변’이었다. 블리자드는 이번에는 대륙의 지하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검은 용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설정을 만들어냈다. 이 용은 그동안 와우 사용자들이 골목길까지 외우고 있던 대륙의 지도를 다시 그려놓았고, 이 용이 세계를 파멸시키려 한다는 스토리를 만들어내 사용자들에게 용과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부여했다.
나도 주섬주섬 다시 컴퓨터에 게임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외우는 양 접속창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새롭게 바뀐 공간도, 새로운 스토리도 궁금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궁금했다. 여기에 함께 게임 속 모험을 즐겼던 ‘전우’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9일 0시. 게임 속 세계에 대격변이 시작되자 수많은 사람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빠서 게임에는 통 접속하지 못하던 친구의 ID도 함께 보였다. ○ 열광의 현상
‘전쟁 명인의 세계’(월드오브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s)라는 뜻을 가진 이 게임은 미국의 게임회사 블리자드가 개발한 가상의 세계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소설 못지않게 이 게임 또한 기본 역사만 해도 웬만한 단행본 한 권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스토리를 자랑한다.
하지만 블리자드가 만들어 놓은 이 기본 골격보다 훨씬 대단한 건 이 게임의 주변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주변부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세계에 등장하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출판된다. 대격변 이전 시나리오의 주인공이었던 세계를 파멸시키려던 악당 ‘아서스’는 같은 이름의 소설책이 크게 인기를 얻은 뒤 인기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감독 샘 레이미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최근 발간된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소설인 ‘섀터링’은 출간과 함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도 유명 웹툰(인터넷만화) 작가 조석 씨 등이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주변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를 그리고 있으며 게임 속 사건이나 주요 인물을 전문 일러스트레이터 수준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팬들도 수두룩하다. 이런 팬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게임의 이야기를 살찌우고 제작사가 의도하지 못한 다양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9일 낮 12시 46분. 대격변이 시작된 지 12시간 46분 만에 내가 있는 게임 공간인 ‘데스윙 서버’에 첫 85레벨이 등장했다. 대격변 이후 높아진 최고 레벨을 거의 쉬지 않고 게임을 해서 이뤄낸 성과였다. 85레벨을 처음 이뤄낸 ID가 Demonleap인 사용자에게는 ‘축하한다’는 찬사와 ‘게임만 하고 사느냐’는 비아냥이 동시에 쏟아졌다. 이와 함께 각종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수많은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중요한 모험에는 집단 협력이 필수적이다. 누군가 온몸으로 적의 공격을 맞으며 버티고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다른 이들이 역할을 나눠 치료와 공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희생과 이를 통한 목표의 달성은 게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게임은 결국 게임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도 영화일 뿐이었고, 그림도 그림에 불과하다. 어떤 예술작품도 게임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명성을 얻는 경험은 주지 않는다. 그래서 떠나갔던 1200만 명은 오늘도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들은 곧 다시 떠나겠지만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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