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으로 앉힌 강화도령, 어떻게 가르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7일 03시 00분


조선 헌종-철종 수렴청정, 순원왕후 편지 번역서 나와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두 번이나 하며 조선후기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힘겨워했습니다. 또 안동 김씨 집안에서 왕으로 앉힌 철종의 교육에 대해 근심도 많이 했더군요.” 조선 23대 왕 순조의 비로 세도정치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순원왕후(1789∼1857)의 한글편지를 처음 현대어로 번역하고 역주를 단 연구결과물이 나왔다.》

1851년(철종 2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순원왕후의 편지.근황을 얘기하는 도중 추사 김정희가 귀양을 간 것을 언급하며 “재주는 있는데 성품이 조급하고 덕성보다 재주가 승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제공 푸른역사
1851년(철종 2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순원왕후의 편지.근황을 얘기하는 도중 추사 김정희가 귀양을 간 것을 언급하며 “재주는 있는데 성품이 조급하고 덕성보다 재주가 승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제공 푸른역사
이승희 상명대 교수(국어사)는 최근 순원왕후가 당시 세도정치 권력의 핵심인 재종(육촌) 동생 김흥근(1796∼1870)과 조카들에게 보낸 편지 57통을 분석한 ‘순원왕후의 한글편지’(푸른역사)를 최근 펴냈다. 서울대 규장각에는 그의 한글편지가 ‘순원왕후어필봉서’(32통)와 ‘순원왕후어필’(25통)이라는 2개의 자료로 보관돼 있다. 이 교수는 편지 내용을 토대로 작성 시기를 분석한 결과 1837∼1855년에 쓴 것으로 추정했다. 이때는 순원왕후의 나이 48∼66세로 헌종과 철종의 재위 기간에 걸쳐 있다.

순원왕후는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을 힘겨워하면서 철종이 친정(親政)하는 데 필요한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새 임금이 글도 배운 것이 없으니 학문이 있어야 치정(治定)이 날 것이니 누가 가르칠 것인가.”(1849년 6월) “(철종에게) 갑자기 기운을 줄이고 글이나 읽으라 하니 갑갑할 때도 있을 터, 나 또한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마음이 때때로 나니 어디 잘 가르칠 수 있겠는가.”(1850년 1월)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였던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다. 안동 김씨 집안에서는 세도정치를 지속하기 위해 사대부가 갖춰야 할 기본학문조차 갖추지 못한 철종을 데려왔지만 수렴청정을 해야 했던 순원왕후에게는 부담이었던 것이다.

통치교육을 받지 못한 순원왕후는 편지로 왕실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안동 김씨 집안의 의견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철종의 비를 간택할 때는 안동 김씨가 속한 노론과 적대관계에 있는 소론 집안에서 뽑을 것을 김흥근과 상의하기도 했다. 자신의 집안에서 이미 왕비가 두 명이나 나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집안의 반대에 부닥쳐 뜻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이 교수는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가 권세를 잡은 것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권력이 집중될수록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집안 형제와 조카들에게 수시로 충고했다”며 “안동 김씨의 권력 집중을 경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공식기록이 보여주지 못하는 19세기 중엽 세도정치의 뒷면과 통치교육을 받지 못한 왕실 여성의 개인적 고심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이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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