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봉우리(향적봉) 위에는 깊은 못이 푸르고 깨끗하며, 좌우에는 흰 모래가 깔려 있다. 그나무는 붉은색의 몸통이고 잎은 삼나무 같으며,기이한 향기가 난다. 남쪽으로 지리산에 이어져, 천왕봉 등 열 지은 봉우리들과 300리에 걸쳐 이어지며 구름과 비로 서로 통한다. 남방의 명산은 지리산이 가장 저명하고 덕유산이 그 다음이니, 그것은 다 까닭이 있다’<이만부(李萬敷)·1664∼1732 ‘덕유산기(記)’에서> 》
덕유산(德裕山)은 흙산이다. 둥글둥글하고 맏며느리처럼 후덕하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산이다. 뭇 생명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나라에 난리가 날 때마다 백성들은 앞다퉈 덕유산 품으로 숨었다. 그 넉넉한 품 안에서 목숨을 건졌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이 덕유산으로 스며들어 생명을 유지했다. 왜군들은 덕유산을 그냥 지나쳤다. 왜군이 덕유산으로 들어오려 할 때마다 안개와 구름이 짙게 일어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구천동 계곡은 덕유산 중에서도 가장 구불구불하고 긴 골짜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9000명의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9000명의 스님이 머물렀다’는 뜻의 ‘九千屯(구천둔)’이 오늘날 ‘구천동’이 됐다는 것이다. 무주 설천면의 ‘雪川(설천)’도 9000명의 스님이 밥을 지을 때마다 쌀뜨물이 시냇물을 하얗게 만들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구천동 계곡의 굽이가 9000굽이라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다. 구천동은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 관문이었던 나제통문(羅濟通門)부터 덕유산 으뜸 봉우리인 향적봉까지 25km를 말한다. 산꼭대기에 쏟아진 빗물은 구절양장 구불구불, 돌고 돌아 금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그렇다. 구천동 계곡은 아득히 깊고, 한없이 길다. 안개가 피어오르면 골짜기 문이 닫혔다가, 해가 떠오르면 스르르 문이 열린다. 오죽하면 ‘9000명 정도의 사람이 살 수 있는 골짜기’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덕유산은 보통 구천동계곡의 삼공탐방지원센터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한다. 계곡을 따라 산책하듯 느릿느릿 걸으면 된다. 왼쪽 아스팔트길(저전거길)보다는 오른쪽 자연관찰로가 호젓하다.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등 참나무들은 모두 옷을 벗었다. 젖은 참나무 잎들이 붉은 살 생선회처럼 나란히 숲길에 누워 있다. 밟는 맛이 쫄깃쫄깃하다. 발바닥에 둥글게 감겨온다.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잣나무가 군데군데 푸른 바늘잎을 달고 서 있다. 황갈색 마른 바늘잎들은 길바닥에 가지런히 엎드려 있다. 바늘잎 2개가 붙어 있는 것은 소나무, 3개는 미국산 리기다소나무, 5개는 잣나무. 쏴아!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바늘잎들이 우수수 비듬 떨어지듯 날린다.
계곡물소리는 우렁우렁 힘차다. 굽이굽이 푸른 웅덩이요, 작은 폭포다. 그 물속엔 참갈겨니, 금강모치, 쉬리, 돌상어, 참종개 등이 겨울을 나고 있다. 바람이 알싸하다. 물빛은 맑고 그윽하다.
백련사 부도 밭엔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사 회장이었던 러더미어 3세의 회백색 부도가 눈길을 끈다. 그의 한국인 장모였던 최낙순 씨 부도와 나란히 서 있다. 최 씨의 고향은 무주구천동. 그는 백련사의 독실한 불자였다고 한다. 사위 러더미어 회장은 생전에 장모의 손에 이끌려 백련사를 자주 찾았고 이곳 풍광에 반했다. 결국 죽어서도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인연은 묘하고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향적봉 오르는 길은 실제 백련사에서 시작된다. 2.5km 거리지만 대부분 눈길이다. 아이젠은 필수장비이다. 신발도 발목 끈을 다시 한 번 꽉 조여야 한다. 눈길은 조금씩 밀리는 맛으로 걷는다. 싸드락싸드락, 싸목싸목(느릿느릿의 무주사투리) 걸어야 ‘눈 밟는 맛’이 난다. 평지에선 한 걸음 떼면 정확히 그 거리만큼 나아간다. 눈길에선 한 걸음에 10∼20cm씩 뒤로 밀린다. 그만큼씩 헛걸음이 된다. 그렇다. 눈 쌓인 산길은 바로 그 맛으로 걷는다. 뭐든 한 번에 완벽할 수는 없다. 조금씩 모자라야 마음이 편안하다. 느긋해진다.
“뽀드득 뽀득!” 앞부리로 걷는 소리다. “저벅 부드득!” 발뒤꿈치부터 즈려밟는 소리이다. “두둑 두두둑!” 눈을 통째로 밟는 소리이다. 눈이 많이 쌓이면 발이 푹푹 빠진다. “퍼벅! 퍼버벅!”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눈 속에 발이 빠지면, 발목이 목도리 두른 듯 따뜻하다. 푸른 조릿대가 머리에 눈꽃을 우우우 피우고 있다. 사람들은 눈길을 나긋나긋 밟는다. 살몃살몃 지그시 밟는다. 살금살금 어르듯이 밟는다. 발밑의 개구리들은 겨울잠을 잘 자고 있을까? 뱀들은 춥지나 않을까? 두꺼비들은 배고프지 않을까?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나뭇가지에 얼음 꽃이 피었다. 상고대(Air Hoar)이다. 철쭉 가지에 얼음꼬마전구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억새 쑥대머리에도 하얀 얼음 꽃이 다발로 피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나무에도 주렁주렁 매달려 수정처럼 빛난다. 영락없는 크리스마스트리이다. 금방이라도 깜박깜박 전깃불이 들어올 것 같다.
상고대는 나무서리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얼어붙은 것이다. 이슬 꽃, 눈물 꽃이다. 멍울멍울 은구슬 꽃이다. 한 줄기 겨울햇살에도 반짝반짝 번득이는 비수 꽃이다.
‘온몸을 쓰러뜨릴 듯 휘몰아치는 바람/우듬지로 재우고/잎을 떨어낸, 상처 난 자리에도/꽃을 피우고야 마는/나무//뿌리가 밀어 올리는 거한 숨, 뜨거운 열정/얼음장 같은 난로 품어야/선명한 나이테 하나 더 그려내고/둥글게 내면을 살찌운다는 거/싹둑 잘려진 나무의 밑동이 보여주고 있다’ <남명숙의 ‘상고대’에서>
나뭇가지들은 겨우내 상고대를 피우며 ‘얼었다 녹았다’를 되풀이한다. 살은 얼고 피부는 트다 못해 얼어터진다. 그래도 얼음꽃을 피우고 또 피운다. 강원도 대관령고개의 황태들처럼 칼바람 속에서 묵언정진 동안거를 한다. 신음소리, 기침소리 한 번 없다. 나무는 그렇게 얼음꽃을 수없이 피운 뒤에야, 비로소 새봄 황홀한 꽃을 피워 올린다. 붉은 철쭉꽃도 그렇게 올라온다. 노란 생강나무꽃도 그렇게 토해낸다. 매화나무 가지에 화르르 등불을 단다. 울컥울컥 붉은 진달래꽃을 매단다.
향적봉(香積峰)은 ‘향기 가득한 봉우리’이다. 주목나무 향이 진하다. 가야산, 황매산, 중봉, 지리산 천왕봉,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 서봉, 대둔산, 계룡산, 적상산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산 뒤엔 산이 주름지어 서 있다. 산 첩첩, 눈 아슴아슴. 얼음바위에도 얼음꽃이 활짝 피었다. 크고 작은 산과 들이 모두 발아래에 있다.
향적봉에서 곤돌라가 있는 설천봉까지는 20분 거리이다. 얼음꽃길을 따라 가면 나온다. 스노보드나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로 발길이 북적인다. S자로 미끌미끌 내려가는 그들의 어깨가 들썩인다. 남덕유 쪽으로 가려면 중봉으로 가야 한다. 중봉에서 보는 덕유산도 장관이다. 노약자들은 아예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이른 뒤 향적봉으로 향한다. 향적봉에서 경치를 감상한 뒤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겨울 덕유산은 아늑하다. 매운바람도 눈꽃이 피면 잦아든다. 얼음꽃이 피면 하늘이 열린다. 하늘은 구만리장천 저 멀리 푸르게 뻗어 있다. 향적봉에 오르면 온갖 소리가 눈에 보인다. 관음(觀音)이다. 바람소리, 나무들의 신음소리, 벌레들의 겨울잠 숨소리…. 위대한 적막이다.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보이지 않는 움직임을./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내리는 눈 사이로/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안에서는 어둠이노라./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쌓이는 눈 더미 앞에/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의 ‘눈길’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머루(Wild Grape)는 야생포도이다. 야생포도는 무주 같은 고원지대에서 잘 자란다. 무주는 점토질 흙인 데다 비탈진 곳이 많다. 비옥하진 않지만 물이 잘 빠지고 통풍이 좋다. 해발 900m의 고원지대라 일교차가 크다. 일교차가 크면 과일의 당도가 높아진다. 무주 산머루는 꿀처럼 달다. 머루는 포도보다 알이 작고 껍질이 두꺼워 와인 양조에 안성맞춤이다.
와인은 숙성하고 저장하는 곳이 필요하다. 온도가 일정해야 그 맛이 유지된다. 때마침 무주엔 기가 막힌 인공 머루와인동굴이 있다. 무주 산머루와인을 숙성하고 저장 판매하는 동굴이다. 붉은 치마처럼 생긴 적상산(1034m) 중턱(해발 400m)에 뚫린 굴이다. 무주양수발전소 건설(60만 kW 용량·1995년 준공) 당시 작업터널로 쓰던 것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양수발전이란 아래쪽 저수지의 물을 위쪽 저수지로 끌어올려 저장해뒀다가, 그 저장된 물을 아래 저수지로 떨어뜨려 발전하는 방식이다. 즉 적상산 꼭대기 부근(875m)에 위쪽 저수지가 있고, 아래 저수지는 해발 275m 지점에 있다. 와인동굴은 그 당시 작업을 하기 위해 위아래 저수지 가운데 옆구리를 파고 들어간 흔적이다. 발전시설은 지하에 있다.
동굴은 너비 4.5m 높이 4.7m 길이 579m. 기온이 섭씨 12도 안팎으로 늘 일정하다. 와인 저장에 안성맞춤이다. 머루와인 2만여 병이 동굴 양쪽 나무저장고에 누워 있다. 누구나 직접 들어와서 시음도 할 수 있고, 직접 살 수도 있다. 장기보관(keeping)도 가능하다.
머루와인은 샤또무주, 산들벗 레드 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격은 1병에 1만8000∼2만5000원. 와인동굴에선 20∼30% 싸게 살수 있다. 와인동굴은 11∼2월엔 오전 11시∼오후 4시, 3∼10월엔 오전 10시∼오후 6시 문을 연다. 매주 월요일은 문을 닫는다. 063-322-5931
▽승용차=서울∼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무주나들목
▽버스=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나 무주구천동행(오전 7시 40분 하루 1회). 3시간 소요.
○ 먹을거리
무주는 어죽이 유명하다. 금강 상류에서 투망으로 잡은 민물고기로 끓인다. 동자개(빠가사리), 모래마루, 메기, 모래무지 등을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삶아 육수를 낸다. 고기의 뼈를 발라낸 뒤 그 육수에 불린 쌀을 넣고, 고추장 풀어 뭉근한 불에 진득하게 끓인다. 거의 다 끓을 때쯤 수제비 떼어 넣고, 파 마늘 부추 등을 섞으면 된다. 후추 들깨가루를 양념으로 친다. 얼큰 매콤하고 시원하다.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다.
무주 어죽은 동자개를 많이 쓴다. 잡아 올릴 때 “빠각 빠각” 소리를 내 일명 ‘빠가사리’로 불리는 민물고기다. 물 흐림이 느린 강바닥에서 주로 산다. 금강물이 휘돌아나가는 무주 내도리(內島里) 일대에 어죽식당이 많다. 그곳 일대에서 동자개가 많이 잡히기 때문이다. 내도리는 안동 하회마을처럼 물이 휘돌아나가는 물돌이동이다. 이름 그대로 ‘육지 속의 섬’이다. 앞섬(전도리), 뒷섬(후도리)이 있다.
무주엔 어죽식당이 수두룩하다. 무주 사람들은 군청 옆에 있는 25년 역사의 금강식당(063-322-0979)을 많이 찾는다. 내도리는 큰손식당(063-322-3605)과 섬마을(063-322-2799)이 붐빈다. 버섯전골 산채비빔밥집 장미회관(063-322-5551)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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