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보면 먹 장난치던 딸이 그립구나…” 조선의 ‘父女有親’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27일 03시 00분


박동욱 교수, 한시 17편 분석

우리가 한 시대에 대해 고정시킨 이미지는 종종 그 시대 개인의 일상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남녀유별과 장유유서 의식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아버지와 딸 사이에 흐르던 감정을 상상하기 힘든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자신의 곁에 없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감정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을 뚫고 나와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13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1813년에 그린 ‘매화쌍조도’는 조선시대의 부정(父情)을 드러내는 대표적 미술작품이다. 다산은 아내가 보내온 색 바랜 다홍치마에 매화와 참새 한 쌍을 그려 한 해 전 시집간 딸에게 보냈다. 오랜 유배생활의 역경 속에서도 딸에 대한 애정을 억누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양대 학부대 박동욱 교수(한문학)는 조선시대 아버지들이 딸에 대한 사랑을 담았던 한시 17편을 모아 풀이한 글 ‘고사리 손으로 먹 장난치던 네가 그립구나’를 내년 1월 초 나오는 한국학 계간지 ‘문헌과 해석’(겨울호)에 발표한다.

근엄했던 조선의 아버지들도 딸아이의 재롱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인조 때 공조참판 조위한(趙緯韓·1567∼1649)은 집을 떠난 뒤 까마귀를 보면 벽에다 먹을 칠하던 딸아이가 떠오르고, 고사리만 보아도 밤을 달라고 보채던 아이의 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이 같은 심정을 한시 ‘딸자식을 생각하며’에 담았다. 그는 ‘엄마 옆에서 화장하는 흉내를 내곤 했던 딸이 밤마다 아비를 찾아 울다 지쳐 잠이 들 것만 같다’며 절절히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숙종 때 예조판서 신정(申晸·1628∼1687)도 말을 막 배우던 딸이 꽃을 꺾어 와서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엄마 아빠 제가 꽃처럼 예뻐요?’라고 묻던 모습을 회상했다.

남아선호 의식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도 나타난다. 영조 때 이조좌랑 심익운(沈翼雲·1734∼미상)은 ‘못난 아들 반드시 어진 딸보다 나은 건 아니니/못난 아비 평생토록 이 애에게 의지하리’라고 썼다.

예뻐하던 딸이 시집을 간 뒤 근친(覲親·어버이를 뵙는 일)하러 친정으로 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몸도 달았다. 광해군 때의 유학자 김우급(金友伋·1574∼1643)은 ‘딸아이가 친정 오는 것을 기다리며’에서 혹시나 딸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문턱이 닳도록 대문을 드나들던 일을 숨기지 않는다.

여식을 다른 세상으로 앞세워 보낸 아비들은 목 놓아 울었다.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이현석(李玄錫·1647∼1703)은 단옷날 선영에 제사를 지내다가 어려서 죽은 딸아이가 묻힌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20년이나 흘러 묻은 장소가 어딘지 가물가물하니 더욱 가슴이 아렸다.

정조 때 문신 박윤묵(朴允默·1771∼1849)은 딸의 대상(大祥·사망한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이 지나자 사위가 재혼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딸이 눈물겹게 더 보고 싶었다. ‘외손자에게 새엄마가 생긴 일은 다행’이라면서도 사위를 축복해 줄 수도 없다며 딸의 혼령이라도 자신의 애절한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박 교수는 “딸에 대해 남아를 대체할 수 없는 결핍된 존재나 무관심한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딸 사랑은 지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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