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2010 공연속 인상적인 순간들

  • Array
  • 입력 2010년 12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조명이 꺼져도… 이 장면은 남았다

《공연담당 기자로서 중요 작품을 빠짐없이 보고자 노력했지만 의욕을 따르기엔 족탈불급이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작품을 보려 했지만 이미 끝난 경우도 있고, 같은 작품도 출연 배우에 따라 굴곡이 심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개인적 관극(觀劇) 경험만으로 올 한 해 어떤 작품이 최고이고 어떤 배우의 연기가 최고였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 다만 올해 공연된 작품들의 기억의 부패를 막기 위한 ‘방부제’로서, 극히 주관적인 ‘인상적인 순간들’을 뽑아봤다.》
뮤지컬 ‘스팸어랏’에서 로빈 경이 뮤지컬 캐릭터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스팸어랏’에서 로빈 경이 뮤지컬 캐릭터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스팸어랏’에서 아서왕(정성화)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제작하라는 과제를 부여하자 신하인 로빈 경(김재범)이 이 과업에 반드시 필요한 ‘특수한 사람들’을 노래로 설명하는 장면. 원작에서 특수한 사람들이란 브로드웨이 뮤지컬산업을 장악한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지붕위의 바이올린’의 주제곡이 이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어 공연에서는 유대인이 연예인으로 탈바꿈한다. “노래 못해도 상관없죠/일단 TV에 나왔다면 콜…/오, 대박나고 싶음/연예인을 잡아요.” 갈수록 연예인 스타 의존도가 높아가는 한국 뮤지컬계에 대한 기막힌 자기풍자였다.

연극 ‘사랑이 온다’에서 가출했던 아들(김수현·오른쪽)이 절규하는 장면. 사진 제공 극단 전망
연극 ‘사랑이 온다’에서 가출했던 아들(김수현·오른쪽)이 절규하는 장면. 사진 제공 극단 전망
연극 ‘사랑이 온다’에서 아비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가 15년 만에 그 자신 폭력에 중독된 짐승이 되어 돌아온 아들(김수현)이 절규하는 장면. 어미가 아비의 무차별 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도 무력했던 자신을 저주했던 그는 자신도 사랑하는 여인에게 똑같은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몸부림친다. “혁대나 몽둥이 손에 들면 아버지란 자가 튀어나와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시커먼 암(癌)덩이 말입니다. 이 괴물, 짐승새끼는 멈출 줄을 몰라요. 고삐도 없어요.” 그러면서 어미가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개 패듯 팬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자신의 가슴을 치는 어머니(길해연)의 기나긴 탄성만큼 슬픈 게 또 있을까.

창작극 ‘천국에서의 마지막 계절’. 사진 제공 극단 작은신화
창작극 ‘천국에서의 마지막 계절’. 사진 제공 극단 작은신화
연극 ‘천국에서의 마지막 계절’에서 야차와 같은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극빈층으로 살아가는 집안에 찾아온 배불뚝이 임신부(최복희)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산동네를 올라오느라 너무 힘들었다며 푼수처럼 수다를 떨던 이 여인은 “아내와 두 딸을 구하려면 보험에 들어 있는 아들을 죽이라”는 사채업자들의 최후통첩을 전하러 왔음이 밝혀진다. 기겁한 가장(장용철)이 칼을 들고 위협하자 그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으며 묻는다. “덫에 걸린 토끼가 덫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고는 스스로 답한다. “자기 발목이라도 이로 갉아서 끊어야죠. 전 그렇게 살아남았어요. 세 발로 까깡총∼ 까깡총∼ 뛰는 토끼.”

러시아 연극 ‘폭풍’의 강둑 러브신. 사진 제공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러시아 연극 ‘폭풍’의 강둑 러브신. 사진 제공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댄스 뮤지컬 ‘컨택트’에서 세 번째 에피소드의 여주인공인 노란 드레스의 여인(김주원)이 등장하는 장면과 러시아 연극 ‘폭풍’에서 볼가 강 강둑에서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 브로드웨이 최고의 안무가 수전 스트로먼이 연출한 ‘컨택트’는 고급스러운 무대연출과 롤랑 프티의 발레 ‘젊은이와 죽음’에서 모티프를 얻은 노란 드레스 여인의 관능적 춤사위로 남자들 환상의 정곡을 찔렀다. 반면 ‘폭풍’은 물을 가득 채운 수조와 수조 속 풍경을 반사해 보여주는 금속판, 그리고 몇 개의 널빤지로 구성된 ‘가난한 무대’를 토대로 잘 훈련된 배우들의 곡예에 가까운 몸 연기로 풍성한 관능미를 건져 올렸다.

일본 번역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일본 번역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말레이시아의 일본인 은퇴이민촌을 무대로 한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에서 남편의 외도를 모르는 척 눈감고 살아가는 중년여성 치즈코(서이숙)와 비디오테이프 배달부인 하라구치(박완규)가 풍선껌을 나눠 씹는 장면. 학창시절 집단따돌림(이지메)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치즈코와 일본에서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로 살던 하라구치는 ‘일본 없는 일본문화’에서 뿌리 뽑힌 공허한 삶을 산다. 일본 고도성장의 신화의 희생양으로 좀비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초일류국가를 향해 달려가는 한국사회도 머지않은 미래에 ‘아웃 오브 코리아’의 악몽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불편한 예감에 젖어들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