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아시아경기를 한 달 앞둔 올해 10월 대표팀 훈련장에서 만난 양재호 감독(9단)은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아직 조직위원회로부터 대회 룰 규정을 명확히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생일대의 승부를 앞둔 선수들에게 어떠한 준비를 시켜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가장 걱정한 것은 남녀 혼성복식에서 채택된 ‘타임아웃제’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뒤늦게 받은 규정집에 없던 내용이 경기 하루 전에 열린 룰미팅 때 발표된 것이다. 예를 들면 착수한 손으로 초시계를 눌러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초속기 위주인 아시아경기에 대비해 착수하는 순간 다른 손으로 초시계를 누르는 훈련을 줄곧 해온 대표팀의 당혹감은 컸다. 심야까지 이어진 대책회의에서 항의 표시로 왼손을 의자에 수건으로 묶고 대국하자는 강성 의견도 나왔다. 다음 날 한국대표팀은 실수를 방지한다는 결의 차원에서 전원이 왼손에 손수건을 두르고 경기장에 들어섰다.
다행히 단 한 명의 실수도 없이 한국의 완벽한 종합우승으로 막이 내렸지만 대회 내내 대국 룰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됐다. 2010년은 삼성화재배 김은선-루지아 간의 사석 사건, 지지옥션배 안관욱-김윤영 간의 옥집 사건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기전들에서 유난히 분쟁이 많았던 한 해였다. 연말 한국기원이 발표한 바둑계 10대 뉴스에 이례적으로 한 대목을 차지한 것도 ‘바둑룰 정비 시급’이란 이슈였다.
특히 옥집 사건은 명쾌한 해결 없이 TV에 그대로 생중계돼 아쉬움이 더 컸다. 옥집은 집이 아니라는, 삼척동자도 알 만한 바둑의 기본 룰이 훼손됐는데도 당사자들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유로 승부가 그대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대국 당사자 해결의 원칙이 바둑 룰의 원칙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동네바둑에서도 지켜지는 룰이 프로 대국에서 무시된 것이 팬들에겐 안타까웠을 것이다. 입회인이 현장에 없어도 바둑의 기본 룰에 관한 사항은 규정집 하나로 현장에서 해결될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대국이 TV나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현실에서 당사자 해결 원칙이 예외 없이 묵수되어야 하는지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심판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대국자들은 대국에만 몰두할 수 있어 훨씬 낫다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판제 도입이 당장 어렵다면 입회인의 재량과 관여도를 대폭 높여야 할 것이다. 적극적 개입을 금지한 현행 입회인 제도는 의도와 달리 자칫 모든 부담을 대국 당사자들에게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대국 룰과 심판제는 한국만 나선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국제 경기가 잦은 상황에서 한중일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할 수밖에 없다. 계가 방식이나 귀곡사 처리의 차이처럼 바둑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에서 오는 간극이야 하루아침에 극복할 수 없겠지만 이번 아시아경기나 사석분쟁처럼 대국 진행과 관련한 룰의 정비는 새해에 반드시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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