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관(新文館)은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세운 출판사다. ‘소년’ ‘청춘’ ‘아이들보이’ 같은 유명한 잡지를 창간했고 한국 최초의 문고본 기획 ‘십전총서’를 냈다. 훗날 ‘동명사’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도 출판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출판사다.
‘신문관 번역소설 전집’(소명출판)은 신문관 창립 직후부터 3·1운동 전야까지 펴낸 번역소설 일곱 권을 현대어로 복원해 한 권에 담은 책이다. 이 작업을 한 사람은 연세대 국문과에서 ‘한국의 근대 번역 및 번안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진영 씨(38·사진). 지난해 봄부터 1년 반에 걸쳐 신문관 번역소설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걸리버 유람기’, ‘불쌍한 동무’(플랜더스의 개), ‘검둥의 설움’(엉클 톰스 캐빈), ‘해당화’(부활) 등을 실었다.
“불쌍한 동무는 육당이, 검둥의 설움은 춘원 이광수가 번역했습니다.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해외 소설을 번역해 독자들에게 알리는 데 앞장선 것이지요.” 박 씨는 이들의 번역이 현대 독자들이 봐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는 높은 수준이라고 평했다. “현대어로 바꾸는 일을 하긴 했지만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손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래된 번역이라 해도 매끄럽게 읽히고 우리말 구사가 깔끔합니다.”
자료를 구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 도서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찾았지만 대개 귀중본이어서 복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일일이 손으로 베껴야 했다. 도서관에 없는 자료들은 개인 소장자를 찾아 헤맸다. 발로 일궈낸 귀한 성과다.
“전집에 실린 작품들은 1910년대에 나왔습니다. 이에 앞서 1900년대에 ‘나폴레옹 전기’ ‘워싱턴 전기’ 등이 우리말로 옮겨졌지만 대부분 ‘읽고 배워야 한다’는 계몽적인 의도가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걸리버 유람기 등의 1910년대 번역물을 보면 번역자들이 ‘세계문학’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학성 높은 세계 명작을 읽고 향유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톨스토이의 부활을 번역한 해당화는 3·1운동 이후 3쇄까지 나가서 독자 반응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박 씨는 “일제의 강제병합이 시작된 1910년대를 문화적 암흑기로 부르긴 하지만 이런 작품을 통해 당시를 정치적인 시각으로만 보지 않고 ‘감수성의 역사’를 다시 볼 여지가 생기는 것”이라면서 “문학사 연구에서 소외됐던 번역작품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번역자료 정리를 계속하고 있는 박 씨는 “개인 소장자나 사설기관에서 선뜻 자료를 내주지 않는 경우도 많고 시장에서 거래되면서 종적을 감추기도 한다”며 “귀중한 자료일수록 널리 읽혀야 한다는 의식이 정착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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