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뮤지컬단) 단장을 지낸 박만규 씨(73)가 최근 펴낸 1006쪽짜리 책 ‘한국뮤지컬사’(한울아카데미)에서 그동안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로 언급돼 온 1960년대보다 20년 정도 앞선 1944년에 창작뮤지컬이 제작됐다고 주장했다.
책에 따르면 ‘견우직녀’는 194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 설의식(1900∼1954)과 학예부장 출신 서항석(1900∼1985)이 함께 창단한 라미라가극단이 공연했다. 서항석이 극본을 쓰고 설의식이 가사를, 안기영이 작곡을 맡았다.
견우직녀는 배우 10여 명과 합창단 20여 명, 무용단 12명, 반주악단 20여 명이 39개 뮤직 넘버를 소화한 2시간 분량의 대작이었다고 박 씨는 밝혔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962년 유치진 연출의 ‘포기와 베스’를 뮤지컬 형식을 도입한 첫 시도로 보고 1966년 유인형 연출로 재공연된 ‘포기와 베스’에서 그 형식적 완성이 이루어졌다고 보아 왔다. 최초의 창작뮤지컬로는 예그린악단(서울시립가무단의 전신)이 1966년 제작한 ‘살짜기 옵서예’(연출 임영웅)가 꼽혀 왔다.
박 씨는 ‘살짜기 옵서예’ 초연 이전 예그린악단에 입단했으며 1984∼1991년 서울시립가무단 단장을 지낸 뮤지컬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꼽힌다. 그는 ‘견우직녀’에 대한 내용을 1984년 뮤지컬 ‘성춘향’을 공연할 당시 서항석에게서 직접 듣고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1942년 간행된 ‘춘추’ 8월호에 실린 극본에는 노래마다 ‘민요풍’ ‘단가풍’ ‘가곡풍’ ‘명곡풍’이란 기록이 병기됐는데 ‘대화풍(레치타티보)’과 ‘재즈풍’이란 기록도 발견됐다. 라미라가극단 음악부장 출신으로 예그린악단 단장으로 ‘살짜기 옵서예’의 프로듀서였던 박용구 씨도 1970년 발간한 ‘음악의 주변’에서 “‘견우직녀’는 무용도 곁들인 본격적인 뮤지컬 판타지”라고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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