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학계에서 연구자들은 한국연구재단이 요구하는 시스템과 제도에 종속돼 그 틀 안에서만 연구해야 한다.”(김철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형태로 정형화되고, 규범화돼 있는 틀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을 아직도 대다수의 학자들이 굉장히 싫어한다.”(윤해동 한양대 HK교수)
최근 20여 년간 한국 인문 사회과학의 현실에 대해 학자들이 따가운 비판을 쏟아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89년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이후 변화한 환경 속에서 오늘날까지 한국 학계의 학술연구와 교류 현실을 진단한 ‘인터뷰-한국인문학지각변동’(그린비)이 최근 출간됐다. 김항 HK(인문한국)연구교수와 이혜령 성균관대 HK교수가 다양한 분야의 중견학자 15명에게 학문적 여정과 학계 진단,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물었다.
학자들의 인터뷰에서는 특히 1981년 설립된 한국학술진흥재단(현재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 중심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자주 등장했다. 김철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학진에서 어떤 규정을 만들면 (학자들이) 아무 문제 제기 없이 그냥 따라간다”며 학자들의 책임을 물었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는 “문사철 내부에서 서로 읽지를 않는다. 솔직하게 논쟁은 하지 않고 원론적인 얘기 혹은 아주 사소한 해석 얘기만 자꾸 한다. 인문학의 학문적 성격도 사실은 거의 붕괴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학계에서는 식민지 수탈론과 내재적 발전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사관에서 벗어나려는 학술적 시도가 등장한다. 민족주의 자체의 폭력성에 주목한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사료의 실증성에 주목한 윤해동 한양대 HK교수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일국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차원의 연구를 펼치는 백영서 연세대 국학연구원장과 이성시 일본 와세대다 문학부 교수 등이다.
그러나 여전히 민족주의사관의 벽은 높다고 학자들은 말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엮었던 김철 교수는 “(2006년 출간 당시) ‘보수 우파’ ‘일본 우파 같은 소리’라는 비판을 받았다”며 역사에 대한 선악의 이분법이나 도덕주의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연구 흐름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다. 강내희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교수는 “한국 근대성 연구는 부분적으로 어떤 구체적 사례 하나만 잘라내서 근대성의 형성을 추적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식 학문 방식과 세계관으로 과거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 쇠퇴와 함께 그람시, 알튀세르, 푸코 등 서구의 포스트주의가 부상했다. 이후 페미니즘, 소수성 연구, 문화연구 등으로 인문학 연구 주제가 확장됐다. 이와 관련해 책에는 페미니즘 연구의 조한혜정 교수, ‘문화/과학’을 창간한 강내희 교수 등의 인터뷰가 실렸다.
이 같은 흐름에 대한 비판도 있다. 황종연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는 “남의 작품을 베껴 쓰면서 ‘패스티시’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희극적이고 희화화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했고 김진석 교수는 ‘한국어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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