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혜초, 그는 한국 최초의 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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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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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천축 등 답사… 세계 최고 수준 견문록 남겨

중국의 시안에 있는 혜초 기념비. 사진제공 두레
중국의 시안에 있는 혜초 기념비. 사진제공 두레
1915년 일본의 불교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는 밀교의 문헌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辦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에서 밀교승 불공의 유서 내용을 확인했다.

“내가 지금껏 30여 년 동안 밀교의 비법을 전해 여러 제자를 두었다. 그중 일가를 이룬 제자가 여덟이다. 그중 두 명은 입적(入寂)했고 여섯이 남아있는데 금각사의 함광, 신라의 혜초, 청룡사의 혜과, 숭복사의 혜랑, 보수사의 원교와 각초다.”이 글을 통해 불공의 6대 제자 중 한 명인 혜초가 신라인임이 알려졌다. 혜초는 불공의 제자 중에서도 두 번째 서열이었다.

사란달라국, 탁사국, 가라국, 토번국, 오장국, 람파국, 계빈국, 토화라국, 파사국…. 혜초가 4년 간 40여 개국을 다녀온 뒤 쓴 ‘왕오천축국전’은 7세기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평가받는다.

혜초는 배를 타고 중국 광저우를 떠난 뒤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 설법지 사르나트 등 에 있는 4대 탑을 순례하고 중천축의 급고원과 암라원 등에 있는 4대 탑을 둘러봤다. 그 뒤 3개월간 걸어 남천축(데칸고원)에 갔다가 서천축, 북천축을 지나 토화라국(토카리스탄)에 다다른다. 혜초는 이에 멈추지 않고 당시 생소한 나라였던 대식국(아랍)의 지배를 받는 파사국(페르시아)까지 돌아봤다.

당시 천축은 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갔다가 돌아오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왕오천축국전을 번역했던 지안 스님은 저서 ‘왕오천축국전’에서 천축 여행의 어려움을 이렇게 전했다. “404년 지맹은 담참 등 15명과 함께 장안을 출발해 서행구법을 떠났다. 그의 일행이 천축에 도착했을 때는 10명이 죽거나 낙오하고 5명만 무사히 도착했으며, 뒷날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지맹과 담참 두 사람만 겨우 살아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혜초가 동천축을 둘러볼 때 찾은 사르나트(녹야원)의 오늘날 모습.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달은 부처가 그 진리를 처음으로 설법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사진 제공 두레
혜초가 동천축을 둘러볼 때 찾은 사르나트(녹야원)의 오늘날 모습.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달은 부처가 그 진리를 처음으로 설법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사진 제공 두레
실크로드와 왕오천축국전을 연구해 온 정수일 한국문명연구소장은 “동양에서 혜초보다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없었으며, 더욱이 현지 견문록을 남긴 전례는 없다”며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단언한다. 중국의 현장과 의정도 천축을 다녀와 기록을 남겼지만 현장은 육로로만, 의정은 배를 타고 갔다 배로 돌아왔고 혜초처럼 서아시아까지는 다녀오지 않았다.

아시아 대륙을 일주하고 돌아온 뒤 혜초는 당나라 장안에서 밀교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50여 년간 인도 밀교승 금강지를 사사하고 금강지가 입적한 뒤 그의 제자인 불공의 문하생으로 밀교 교리를 한역(漢譯)하는 데 힘써 중국 밀교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혜초가 활약했던 8세기 당나라 장안은 세계적인 도시였다. 서역의 각종 문물과 종교, 세계 각국에서 공부와 장사를 위해 찾아온 다양한 인종들로 늘 붐볐다. 그곳에서 혜초의 입지는 뛰어났다.

혜초는 774년 오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황제의 명에 따라 흑하(黑河)의 옥녀담에서 기우제를 주관했다. 스승 불공이 입적했을 때 황제의 지원으로 장례를 마친 뒤 여섯 제자를 대표해 왕이 베풀어준 하사와 부조에 감사하는 표문을 올린 것도 혜초였다.

이처럼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일가를 이룬 혜초에 대해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청장)는 “혜초는 오늘날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과 같은 업적을 이뤘다”고 말했다. 당시 스님은 유럽의 신학자처럼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위치였다. 유 교수는 “백남준이 한국에서 활동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세계사 흐름에 선 혜초는 마땅히 자랑스러워 할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돌아올 기약이 없던 여행을 마치고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했던 혜초지만 마음 한 편에는 늘 고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혜초는 먼 이국 땅에서 달 밝은 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계림(鷄林·경주)을 그리워하며 시를 읊기도 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당나라에서 존경받는 고승으로 자신의 일에 전력을 다하던 혜초는 결국 타국 당나라에서 780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현재 중국 시안에는 2001년 세운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가 세워져 세계인 혜초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홈페이지 바로가기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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