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백화점인 양 온갖 생활용품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평범한 상품 같은데 잘 보면 개성적 면모가 드러난다. 옻칠 마감한 스피커, 전통 도시락 통을 연상시키는 전기밥솥, 볏짚으로 만든 신소재로 제작한 코트 등에서 일본 디자인의 특징으로 꼽히는 ‘세부에 대한 집중과 정밀함’이 엿보인다.
3월 19일까지 서울 중구 순화동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和: 일본 현대 디자인과 조화의 정신’전은 생활용품을 통해 일본 현대 디자인의 핵심 개념을 소개하는 전시다. 전시 기획자로는 무사시노대의 가시와기 히로시 교수, 21-21디자인사이트 부관장 가와카미 노리코 씨 등 4명이 참여했고 파리와 부다페스트 등을 거쳐 서울에 여장을 푼 전시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일본국제교류기금,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공동 주최.
제목이 암시하듯 이번 전시는 ‘조화의 정신’을 21세기 일본 디자인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 요소로 제시한다. 제품 기획부터 생산까지 전통공예와 최신 기술, 수공업과 산업생산, 도시 디자이너와 지역의 특산품 등 상반되는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의미다.
디자인 강국으로 인정받는 일본의 역동적 성장의 비결을 살펴볼 기회다. 전시 기간 중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일본 디자인의 현주소에 대한 전시 기획자들의 강연도 마련됐다. www.kfcenter.or.kr. 02-2151-6520
○ 전통을 미래로 이어가다
전시 품목으로 일본인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2만 점 중에서 오랜 생명력으로 사랑받고 있는 161점을 선별한 것이 흥미롭다. 주방 완구 문구 등 12개 항목에 걸친 용품을 ‘귀여운’ ‘공예적인’ ‘결이 고운’ ‘감촉이 있는’ ‘미니멀한’ ‘사려 깊은’ 등 일본 디자인의 성격으로 꼽히는 6가지 키워드로 다시 나누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기능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제품 디자인에 일본이 내세우는 ‘조화의 정신’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이는 곧 ‘전통과 21세기의 만남’으로 압축된다. 칠기 공법을 가전제품에 적용하고, 기모노 문양이 주방용품과 결합되는 식이다. 또 세계적 패션디자이너 미야케 잇세이는 두루마리 형태의 조립식 옷을 선보였다. 우산 원단 공장에서 사용하던 편물기에 새 기술을 접목한 결과다.
이렇듯 다른 요소가 하나로 녹아든 디자인의 밑바탕엔 일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철학이 깔려 있다. 한국의 미의식에도 관심이 깊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전통적으로 제작된 사물의 실용적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인물. 전시는 21세기 일본 디자인의 근원을 그가 주장한 ‘민예’ 개념에서 찾고 있다.
그의 아들이자 일본 산업디자인의 선구자로 꼽히는 야나기 소리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1956년 두 개의 합판을 대칭으로 배치해 만든 나비의자는 일본 의자 디자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 새로운 민예의 시대를 열다
전시장 벽에 걸린 일본 지도는 각 제품의 제작공정에 여러 지역의 전통공예가 응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오모리 지역의 나무가공 기법을 활용한 램프, 니가타 현의 전통 옻칠을 응용한 스테인리스 주방용품 등.
큐레이터 가와카미 씨는 “일본 디자이너들은 전통공예에 관심을 갖고 그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며 “이들은 야나기 부자가 말했던 상반된 요소의 접목을 바탕으로 차세대 디자인에 단지 스타일이 아닌, 민예의 본질을 적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전통, 공동체, 지역’에 근간을 둔 새로운 민예의 시대를 열고 있다는 것.
일본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이 융합된 전시는 좋은 디자인이란 자신의 전통과 역사에 뿌리를 두면서도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물론 기억할 것이 있다. “진정으로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충실히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영원한 원칙들에 따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야나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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