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월 대보름날 대부분 오곡밥만 먹지만 사실 약식도 대보름 음식이다. 부럼을 깨면 일년 동안 부스럼을 예방하고 치아가 튼튼해진다고 믿는 것처럼 대보름날 먹는 오곡밥과 약식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같은 밥이라도 두 음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오곡밥은 풍년을 기원하는 음식이고 약식은 충절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이 때문에 오곡밥은 농민들이 주로 먹었고 약식은 양반들이 먹었다.
오곡밥은 기본적으로 농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하늘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고 빌고 복을 내려 달라고 기원하는 음식이다. 조선 후기 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에는 오곡으로 밥을 해 서로 나누어 먹는데 제삿밥을 나누어 먹는 옛 풍속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우리말로 제삿밥이지만 원문을 풀이하면 토지의 신(社)께 제사를 드리며 준비하는 음식(飯)이다.
대보름을 한자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도교에서 나온 말로 복을 내려주는 천관(天官)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을 보살피는 날이다. 천관은 인간에게 복을 주는 동시에 하늘에서 바람과 비를 다스리는 농사의 신이다. 그래서 오곡밥을 차려놓고 천관에게 복을 비는 것이다.
참고로 죄를 용서해 주는 지관(地官)은 칠월 보름에 내려오는데 이날은 중원(中元), 액땜을 해주는 수관(水官)은 시월 보름에 내려오니 하원(下元)이라고 한다.
정월 대보름은 또 해가 바뀐 후 첫 번째로 맞는 보름이다. 첫 보름날에 일년 농사를 준비하며 오곡을 전해준 농사 신에게 풍년을 빌면서 바치는 음식이 오곡밥이다.
대보름이 농사와 관련이 있는 명절이라는 증거는 마을에서 집단으로 지냈던 동제(洞祭)에서 찾을 수 있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단결을 과시하고 또 한 해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것이다.
한편 약식은 충절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그 기원이 나온다.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한 까마귀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만든 음식이 약식이다.
정월 대보름날 까마귀의 안내를 받아서 찾아간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건네주며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임금”이라는 말을 들은 왕이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 통을 쏘라고 적혀 있었다. 화살로 거문고 통을 쏘니 궁궐에 드는 중과 궁주(宮主)가 내통을 하고 있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약식은 왕의 목숨을 구한 까마귀의 충절을 기리는 음식인데 그 때문에 이율곡의 ‘격몽요결’, 허균의 ‘도문대작’, 이익의 ‘성호사설’ 등 조선의 양반들이 쓴 문헌을 보면 모두 대보름 음식으로 약식을 꼽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약식은 서민의 음식은 아니다. 찹쌀과 꿀, 잣, 대추, 밤 등 갖은 재료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옛날 기준으로는 사치스러운 음식이다.
약식에 관한 기록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약식을 찹쌀로 만든다고만 적혀 있다. 그러나 고려 말기 목은 이색이 쓴 시에는 찹쌀에 대추, 밤, 잣을 곁들여 만든다고 돼 있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검은색을 내어 까마귀에게 제사 지낸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충절을 상징하는 약밥이 세월이 흐르면서 갈수록 호사를 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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