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12>‘사진가’ 윤주영 씨

“사진은 기록이자 창조··· 감동 전하려면 작가의 메시지 담아야”

장터에 갔다 오는길. 피곤에 지쳐 열차 차창에 기댄 채 잠든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은 바로 엊그제 같은 우리 삶의 단면이다. 전남 화순, 1994(석정리역의 어머니들)

《국회의원직을 마지막으로 1979년에 정계를 떠났던 윤주영 씨(83)는 52세의 나이에 사진으로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 대학교수, 신문사 편집국장, 칠레대사, 문화공보부 장관 등 화려했던 경력을 뒤로한 채 32년째 오직 한 길, 이 땅에서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1928년생 윤주영’을 입력하면 과거의 빛나는 경력보다 국내외에서 30회의 개인전을 열고 18권의 사진집을 발간한 사진가로서의 활동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집념 하나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윤주영’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온 그를 서울 여의도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계 은퇴 후 갑자기 사진을 시작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정치를 그만 두고 영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찍은 사진들을 여러 중견 사진가들이 보고 카메라 아이(camera-eye:카메라를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가 좋으니 본격적으로 사진을 해보라고 격려를 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사진의 길로 접어들었나요.

윤주영 씨.

“시간의 여유가 생겼어요. 장관 시절 관심은 있었지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인간문화재를 찾아가는 일부터 시작해 몇 해에 걸쳐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여행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문화재의 모습과 해외여행을 통해 만난 여러 나라 원주민들의 진솔한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았어요. 이 사진들이 후일 제 작품집 ‘내가 만난 사람들‘과 ’다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안데스의 사람들‘에 실렸죠. 제 사진인생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네팔의 카트만두 바그마티 강가의 한 아슈람(복지센터)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한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1990년에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이 그해 제15회 이나노부오(伊奈信男)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 상은 일본의 3대 사진상 중 하나로 그가 외국인으로서는 첫 수상자였다. 환갑이 넘은 아마추어 사진가의 수상이란 점에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이나노부오 상이 사진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나를 사진인으로 확실하게 묶어놓는 계기가 되었죠. 수상 이후 사진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사진 이외의 다른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수상 후 2년 내에 해야 하는 수상 기념전이 내실을 갖출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고요.”

―수상 기념작은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동토(凍土)의 민들레-사할린에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할린에는 일제에 징용(徵用)된 우리 동포 약 4만 명이 살고 있었어요. 광복을 맞은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방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갈 때는 일본인과 똑같이 ‘황국신민’의 신분으로 갔는데 전쟁이 끝나자 한국인은 제3국인이니 일본이 귀국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해서 돌아올 수 없었던 거죠. 당시 우리나라는 소련과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인 교섭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일본의 변호사를 통해 간신히 비자를 얻어 1990년 겨울에 사할린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한인노인회 부회장 댁에 머물면서 그분의 안내로 많은 동포들을 만났어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심정을 취재해 1992년 도쿄에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사진을 본 많은 일본인이 크게 분노하면서 일본정부의 간사한 조치를 규탄했고,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한 면을 할애해 대대적으로 내 사진들을 실었습니다. 그 후 일본 외무성이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우리 정부에 공동조사를 제의했고 일본 적십자로 하여금 우리 동포들의 귀국과 한국 정착을 특별 지원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물론 이런 일련의 개선 조치가 내 사진 때문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태백, 1990(탄광촌 사람들)

그 뒤로 그는 ‘탄광촌 사람들’ ‘어머니의 세월’ ‘베트남-전후 20년’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장날’ ‘그 아이들의 평화’ ‘어머니’ ‘50인’ ‘백인백상(百人百想)’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진전과 사진집 출판을 통해 작품활동을 열정적으로 이어왔다. 그의 사진 이력에서 특이한 점은 처음 사진 작업 때부터 아마추어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만 즐기는 사진에 머물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사진 초창기부터 그가 행한 모든 사진작업은 대부분 출판이나 전시로 이어졌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궁금했다.

―사진을 처음부터 전문가처럼 시작한 느낌입니다.

“뒤늦게 사진에 뛰어들었지만 신문사 시절, 사진 보는 눈을 익혔고,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선 기자의 접근방식과 비슷했습니다. 제가 본 안목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앵글이나 피사체의 접근 방식 등 기술적으로 모자라는 부분은 책이나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하나씩 수정해 나갔습니다.”

그의 사진 앵글을 유심히 살펴보면 피사체가 사람일 경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스며 있다. 카메라를 일부러 코앞까지 가져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는 일부러 피사체를 강조해 사진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욕심을 덜어내고 사실에 대한 왜곡을 줄이는 그만의 사진 작법이기도 하다.

내용은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사진마다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마치 그 자신처럼. 그는 부지런한 사람에게서 우리 민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을 보았고 그 속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든 살의 이화할머니. 태안, 1996(어머니의 세월)

“사진의 가장 큰 특성은 기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 사진 예술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가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 문화 등 사진의 대상은 다양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풍경에 빠져 본 적이 있고, 우리나라의 인간국보들을 기록해보고 싶은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1981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의 아트뮤지엄에서 ‘유진 스미스의 회고전’을 보고 나의 갈 길을 결정했습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서 자기의 관심이 쏠리는 문제들을 진지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사진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유진 스미스의 대표적인 작품들(시골의사, 슈바이처 박사, 스페인 마을, 조산원)을 비롯해 미발표 작품에도 압도돼 여러 차례 그곳을 찾고 팬 중의 팬이 되었죠. 그 후 유진스미스의 모든 작품집을 구해놓고 매일 밤늦게까지 열독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여름 안데스 여행 때 찍은 사진 중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사진이 적지 않습니다.”

―작품집들을 보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인물사진은 접근이 어려운데,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가 있습니까.

“촬영에 앞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상호신뢰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탄광촌 사진을 찍으러 가면 시커먼 얼굴을 누군들 찍히려 하겠습니까. 저는 카메라를 꺼내기 전에 그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과의 양해가 성립이 되면 그 후부터는 어려움이 없어집니다. 갯벌에서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찍은 사진은 반드시 그들에게 보내줍니다.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가끔 전화를 걸어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좋은 사진의 바탕이 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무엇입니까.

“영월에 사는 사람들을 찍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그리고 6·25전쟁 등 고난의 일생을 겪은 분들의 지난날과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하여 분발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의 현실과 꿈을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북 임실군 삼계면의 어머니들도 촬영하고 있습니다. 인구 2000명도 안되는 작은 면에서 150명의 박사가 나와 속칭 ‘박사골’로 유명해진 시골마을의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고 아주 작은 농촌에서 어떻게 150명의 박사가 나올 수 있었는지 그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이 궁금해 여러 번 그곳을 찾았습니다. 앞으로도 찾을 예정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난해 충북 음성의 한 농가에서 고추농사의 전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애지중지하던 고추가 죽어버려 촬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날씨가 계속 좋아 우리나라 고추농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완성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인생을 산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물론 사진을 할 겁니다. 오래된 격언이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이 남잖아요.”

―사진을 배우려는 후학들을 위해 한마디 해주신다면….

“좋은 사진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발견하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안목은 카메라 자체의 기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 문학, 철학, 예술 등 해박한 지식을 갖춰야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문화사, 예술사, 사진사 등 폭넓은 역사와 인문학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기 바랍니다. 시대정신이 반영된 분명한 메시지가 담긴 사진을 볼 때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6년 전 폐암 수술을 받았다. 올겨울 맹추위는 몸에 무리를 줄 수 있는 날씨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설 직전에는 사라져 가는 전통장날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기록하기 위해 콧물을 훔쳐가며 시골의 장터를 돌아다녔다. 10년 전에 출판되었던 ‘장날’ 사진집을 개정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에게 적(敵)은 추위도 고령의 나이도 건강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뿐이다. 쉬어도 누가 뭐랄 리 없건만 자신의 의지대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자신만의 앵글로 역사를 쓰듯이 사진으로 기록을 남긴다. 그의 사진 열정은 오늘도 쉼 없이 뜨겁게 타오른다. 한때 별명인 ‘활화산’처럼….

ku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