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五子之歌(오자지가)에 ‘백성은 나라의 뿌리이니, 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다. 송나라 때 학자 范祖禹(범조우)는 국가가 백성들을 救恤(구휼)하기 위해 곡식 창고인 倉(늠,름)(창름)과 재물 창고인 府庫(부고)를 두고 풍년에는 거둬들이고 흉년에는 흩어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위태로움과 난리가 있으면 달려가 윗사람을 구원하기를 마치 자제들이 부형을 보위하듯이 하고 또 마치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듯이 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국시대 추나라의 제후 목공은 어진 정치를 행하지 못했고 관리들은 태만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실상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추나라가 노나라와의 전투에서 장교가 33명이나 죽어갈 때 백성으로서 종군한 사람들이 장교들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추나라 목공은 분격해 백성들을 처단하려고 했지만 맹자는 증자가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出乎爾者(출호이자) 反乎爾者也(반호이자야)’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여 백성들은 평소 자신들을 잔학하게 대해 왔던 관리들에게 보복한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처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고서 군주가 어진 정치를 베풀어야 백성들이 그 윗분을 친애하여 윗사람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斯民의 斯는 지시사로 보기도 하지만 ‘이에’라는 뜻의 접속사로 보는 것이 좋다. 其上과 其長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단 上은 군주, 長은 有司(유사·관리)로 보기도 한다.
주자(주희)가 지적했듯이 군주가 어질지 못하고 부유하기를 구했기 때문에 관리들이 세금을 거둘 줄만 알고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군주가 어질지 못하더라도 관리들이 백성들의 처지를 우선 생각했다면 백성들은 관리들을 친애하지 않았을까. 현대의 관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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