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古代세계 최고의 보물 비단, 문명의 벽을 넘나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2일 03시 00분


실크로드를 이해하는 7개의 시선

실크로드의 요충지 중국 둔황의 막고굴 입구. 막고굴은 사막 높은 곳에 있는 석굴, 위대하고 성스러운 석굴이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민병훈 씨
실크로드의 요충지 중국 둔황의 막고굴 입구. 막고굴은 사막 높은 곳에 있는 석굴, 위대하고 성스러운 석굴이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민병훈 씨
《동서 문물 교류의 젖줄인 실크로드. 20세기 들어 실크로드의 문화적 역사적 의미가 부각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꿈꾸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사막을 오가는 캐러밴(대상무역·隊商貿易)의 행렬, 그 열사의 땅에서 개척한 오아시스, 고대문화의 보고인 둔황 막고굴…. 이곳에선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이떤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며 동서문화를 발전시켰을까. 우리 고대 문화의 시각으로 실크로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포인트를 소개한다.》

○ 왜 비단인가-비단의 경제학

실크로드라는 명칭에서 나타나듯 비단은 실크로드의 상징적인 교역물이었다. 중국에서 생산한 비단은 교역품이나 선물로 주위 여러 나라에 전해졌다. 기원전 1세기경 파르티아를 통해 중국의 비단을 처음 접한 로마인들은 비단의 화려함과 부드러운 촉감에 곧바로 매료됐다. 고대시대 신비한 비단은 실크로드 일대에서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비단은 단순한 옷감이 아니었다. 국가나 개인의 최고 선물이었고 통화를 대신하는 지불 수단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비단에 열광했다. 너무 좋아해 사치스러워졌고 이것이 로마 멸망의 원인의 하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로마는 중국에 직접 사신을 보내 비단을 수입하고자 했으나 실크로드 서쪽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파르티아의 방해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비단에 대한 욕구는 비단 직조 기술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실크로드 주변 지역은 모두 비단과 비단 직조술을 배우려 했다. 서역의 나라 가운데 비단을 가장 먼저 생산한 것은 호탄이었다. 계속 서쪽으로 이동한 비단 직조술은 페르시아 비단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 국제상인 소그드인의 중계무역 비법

비단 등의 무역을 주도한 사람들은 소그드인이었다. 소그드인들은 지금의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무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실크로드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소그드인들은 당시 최고의 국제도시였던 당나라 수도 장안을 비롯해 투루판, 하미, 둔황 등 실크로드 중심지 곳곳에 집단거류지를 형성했다. 곳곳에 일종의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실크로드의 중계무역을 장악했다. 실크로드 사람들은 이 같은 소그드인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국제정세에 대해 들었다.

소그드인들은 원래 이란계다. 그래서 이들이 머물렀던 곳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이 있다.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는 소그드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무역상품처럼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 오아시스의 신비-사막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사막의 오아시스. 낭만적일 수 있지만 실은 처절한 용어다. 사막에서 물은 곧 생명이다. 사막의 사람들은 물을 이끌어내야 했다. 오아시스는 그 물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막에서 물을 모으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막으로 이끌어내는 물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아시스 한곳에서만 머물며 생활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는 이웃 오아시스와 교류를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역과 교류가 발달한 것이다. 사막을 오가는 상인들은 그 행동 역시 경제적이어야 한다. 부피가 큰 것보다는 작고 값진 것을 들고 다녀야했다. 보석이나 향신료 같은 것이다. 이들은 또 사막에서 발생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집단으로 다녀야 했다. 이것이 바로 대상무역, 캐러밴이다. 이렇게 해서 오아시스는 농업도시가 아니라 상업도시로 바뀌어 갔고 실크로드는 무역루트가 되었다. 그 무역루트를 통해 상품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문화까지 함께 이동했다.

○ 바위를 뚫고 막고굴을 만든 이유는

장안에서 시작한 실크로드는 둔황과 누란을 거쳐 서역으로 이어졌다. 둔황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4세기부터 이미 대상무역으로 영화를 누렸던 곳. 경제적 부가 축적됨에 따라 이들은 인도의 석굴사원을 본떠 무수히 많은 석굴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이를 막고굴(莫高窟) 또는 둔황 천불동(千佛洞)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식 명칭은 막고굴이다. 막고굴이라는 명칭은 수나라 때 개착된 423굴에 전하는 묵서로 된 ‘막고굴기’를 통해 확인되었다. 막고굴은 사막 높은 곳에 있는 석굴이라는 뜻이다. 당시 막(莫)이라는 한자는 사막의 막(漠)자로 통용되기도 했다. 이는 위대하고 성스러운 석굴이란 의미로 이어지기도 한다. 천불동은 무수히 많은 불상과 불화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막고굴은 그야말로 불교문화의 보고이자 동서문물교류의 상징공간이다. 둔황석굴 내부의 수많은 불상과 조각 벽화들. 동서 문물 교류의 일대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 실크로드 최고의 인기스포츠는

경북 경주시 구정동 석실분(石室墳·돌방무덤)의 모서리 기둥(통일신라 9세기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이 석조기둥엔 방망이 하나를 어깨에 멘 무인(武人) 한 명이 조각돼 있다. 무덤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한 비상용 방망이일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방망이 끝이 휘어져 있다. 일종의 폴로 혹은 하키 스틱이다. 왼쪽 다리를 약간 들고 서 있는 동적(動的)인 포즈로 보아 이 방망이는 운동기구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폴로가 통일신라시대 인기 스포츠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그 폴로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다.

이 무인의 얼굴은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다.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 즉 서역인(西域人)이다. 그렇다면 왜 서역인이 폴로(혹은 하키) 스틱을 쥐고 있을까. 이는 폴로가 서역에서 전파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서아시아에서 시작된 폴로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 때.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상륙했고 많은 신라인이 외국의 신종 스포츠에 열광했던 것 같다. 이 인기는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다.

9∼10세기 전후, 폴로(혹은 하키)의 인기는 한반도 뿐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중국이나 일본에선 폴로를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 회화가 적잖이 발견된다. 폴로는 요즘의 골프처럼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셈이다.

신라 경주는 국제무역 도시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괘릉의 서역 무인상.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신라 경주는 국제무역 도시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괘릉의 서역 무인상.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실크로드 최고의 인기 교역품은

황남대총 천마총 등 4∼6세기의 경주 고분에서는 모두 25점의 유리그릇이 출토됐다. 이 유리그릇들 가운데엔 로만 글라스뿐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만든 ‘페르시안 글라스’도 있다. 동부 지중해의 유리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유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다. 깨지지만 않는다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유리는 신라인, 특히 지배층을 매료시켰다. 유리그릇은 그렇게 지배층의 상징물이 되었다. 봉수형 유리병의 금실이 이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이 유리병을 보면 훼손된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 보강해 놓았다. 생전에 유리병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기에 금실로 유리병 손잡이를 보강했단 말인가. 당시 신라의 지배층은 금이나 보석보다 유리그릇을 더 귀하게 여겼다.

유라시아 서쪽 끝 지중해 연안에서 유라시아 동쪽 끝 신라의 경주까지 험한 길을 지나온 유리. 그것은 고대의 동서 교류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다. 당시 유리 공예의 최대 산지였던 동부 지중해는 유리를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수출했다. 서기 5, 6세기 유리는 유라시아 최고의 인기 교역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이 유리 제품들은 경주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의 나라(奈良) 지역까지 넘어갔다.

○ 실크로드와 경주를 활보한 서역인-세계인 혜초의 꿈

장안에 모인 서역 문물은 경주로 들어왔다. 경북 경주 시내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신라 괘릉(掛陵).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그 괘릉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풍모의 서역인 사내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당시 신라 경주는 문물이 번창했던 국제도시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멀리는 유럽의 로마, 페르시아에서부터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 괘릉의 페르시아 무인상 2구(각 높이 257cm)다. 얼굴을 보니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등 전체적인 얼굴 형상이 심목고비(深目高鼻) 서역인 풍모다.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흙인형)에서도 페르시아인 등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서역인은 신라의 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 땅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화려한 신라 금관을 탄생시킨 황금의 나라 신라를 찾아 우수한 금속 공예술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실크로드는 경주까지 이어졌다. 신라 승려 혜초가 실크로드를 통해 구법 기행을 다녀온 것처럼. 그건 통일신라의 글로벌 감각, 혜초의 세계 정신의 흔적인 셈이다.

▶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홈페이지 바로가기

::실크로드란?::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리히트호펜이었다. 그는 비단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고원 서쪽 지역과 서북 인도로 수출된 사실에 주목해 이 루트를 실크로드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분야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요즘엔 동쪽으로 장안(지금의 시안)에 그치지 않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까지, 나아가 일본의 나라 지역까지도 실크로드에 포함시킨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길, 오아시스 루트를 가리킨다. 그러나 연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좀 더 넓은 의미로 바라보면,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대를 거쳐 이스탄불과 로마에 이르는 무역루트 전체를 일컫는다. 유라시아 대륙 북방의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스텝루트(초원의 길), 남방의 아라비아해 인도양 동남아시아를 우회하여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의 바닷길도 실크로드에 포함된다.

실크로드는 결국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문명 교류의 젖줄로 이해하면 좋다.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이 가운데 동서 문물 교류에서 가장 핵심적인 루트는 오아시스의 길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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