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시원하게 가로지른 붓질이 힘차면서 부드럽다. 붓이 내달린 흔적을 따라 생겨난 여백이 독특한 무늬를 이룬다. 수려한 산수를 보듬은 양, 바람 세찬 날의 흔들리는 풍경인 듯 볼수록 오묘한 조형적 흥취와 아득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추상화가 윤명로 씨(75)의 근작을 소개하는 전시가 4월 4일까지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다. 지난해 10월 중국 베이징 국립중국미술관 개인전에서 호평받은 대작 등 20여 점을 볼 수 있다. 동양화의 전통을 경신해온 그간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인 그림들로 “필법이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문인추상”(판디안 중국미술관장)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02-310-1924
원로화가의 여유와 자유로움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전시가 열린다. 9일∼4월 6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OCI미술관에서 열리는 오경환 씨(71)의 ‘우주의 심연’전. 이 미술관에서 원로작가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첫 전시다. 40여 년 동안 우주를 그려온 그가 변화를 꿈꾸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02-734-0440
○ 자연의 숨결
윤명로전에는 원초적 자연에 내재된 정신의 숨결을 살리는 일에 흥미를 느껴온 작가의 뚜렷한 지향점이 담겨 있다. 1960년대 추상미술을 선도한 그는 구조적 추상에서 출발해 ‘균열’ ‘얼레짓’ ‘겸재 예찬’ 등의 시리즈를 거치며 동양 준법에 대한 관심을 서구 추상미술과 접목해 왔다. 그 결과 나온 작업은 ‘동양문화에 대한 예찬’이면서 ‘고정적 양식을 깨는 반항’이란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예술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세계화가 화두가 될수록 자국의 전통과 사상을 강조하려는 노력도 커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완성한 그의 추상에선 동양문인화의 가치가 신선한 생명력을 얻는다. 베이징 전시를 본 중국 미술계 인사들이 윤 씨의 철학에 공감하며 서구 트렌드에 휩쓸려 뱡향감각을 잃은 젊은 작가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찬사를 보낸 이유다.
전시는 그가 평창동 작업실에서 마주한 자연을 소재로 산수의 전통을 현재화한 작품을 보여준다. 때론 은은하고 때론 강렬한 색조의 그림이 어우러진 전시장에 활력이 넘친다. 재료에 있어서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개 빛깔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는 물감을 처음 시도했다. 캔버스면서 스크린처럼 다가오는 신작이 편안하면서 상큼한 매력을 풍긴다.
그는 “내 작품은 랜덤(random)이다”라고 설명하지만 제멋대로 오간 듯한 필치 속에서 문인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정갈한 이미지가 드러난다. 깎아지른 절벽 혹은 유장한 물길인 듯, 화가가 추구하는 정신의 흔적이 오롯이 스며든 작품에서 관객은 마음껏 상상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우주의 숨결
‘우주의 심연’전은 2월까지 1년 반 동안 후배 작가들과 어울려 인천 아트플랫홈의 최고령 입주작가로 참여한 오경환 씨의 신작을 보여준다. 1969년 TV를 통해 우주에서 본 지구를 처음 접한 그는 이후 우주를 주제로 작업해 왔다.
이번 전시도 우주의 풍경을 담고 있지만 새로운 변화가 눈에 잡힌다. 어둡고 광활한 우주의 풍경이 펼쳐진 대형 캔버스에 미지의 생명체를 등장시킨 것. 거대한 새와 심해 생물, 혹은 아메바처럼 보이는 생명체가 떠 있는 그림을 보면 화가의 나이를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추상적 화면에 형상과 상징이 뒤섞인 그림에서 자유롭고 유희적인 상상력이 흘러넘친다. 그는 “최근 후배 작가 6명과 창작집단을 만들어 연평도와 천안함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며 “이제 시작이다”라고 밝혔다.
작업만 해도 하루가 빠듯하다는 원로화가들. 나이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고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미지의 영토를 탐구하면서 날마다 더 높은 정신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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