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달콤하다. 아니 그렇게 믿어진다. TV 모니터와 스크린을 보라. 온통 인간 같지 않은 이들에 대한 복수극으로 넘쳐나지 않는가. 특히 영상대국 소리를 듣는 대한민국의 스크린은 끔찍할 정도다. ‘올드 보이’를 필두로 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극 3부작 이후 한국의 스크린은 ‘표현의 자유’란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복수는 나의 것”을 열창하기 바쁘다. ‘추격자’를 거쳐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까지 거의 병적으로 복수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걸까. 먹물 좀 든 사람들은 정의에 굶주려서라고 한다. 현실에선 늘 유보되는 정의실현을 사적인 복수극을 통해 대리만족하려 한다는 것이다. 가소로운 소리다. 그럼 과거의 대한민국이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정의로웠다는 소리인가.
그보단 정의를 빙자해 복수의 짜릿함을 느끼려는 대중의 금지된 욕망을 묶어둔 봉인이 풀렸다고 봐야 한다. 현대인들이 갈수록 복수를 열망하는 것은 그것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가 확립된 근대 이후 사적인 복수는 금지됐다. 법이라는 제3자가 그걸 불충하게 대신해줄 뿐이다. 따라서 ‘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명제는 복수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우리의 병든 스크린이 보여주듯 그 금지된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기 마련이고, 복수의 대상을 잡아먹고 자신까지 잡아먹는 게 바로 복수의 법칙이다. 복수는 정의의 가장 저열한 형태다.
극단 C바이러스의 연극 ‘아미시 프로젝트’(제시카 딕키 작·이현정 연출)는 이렇게 ‘복수 바이러스’가 골수까지 파고든 한국사회에 ‘용서의 백신’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다. 연극은 200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아미시 마을에서 일어난 충격적 실화를 토대로 한다.
사건의 개요는 공연 내내 수없이 반복되는 한 줄 대사로 요약된다. “한 남자가 아미시 학교에 들어가 총을 쐈다.” 그 총기난사로 여섯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 여학생 다섯이 죽고 범인은 현장에서 자살했다. 선정적 뉴스에 목마른 언론은 흥분한다.
아미시가 누구인가.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위트니스’로 널리 알려진 아미시는 1600년경 유럽의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피난 온 기독교 재세례파의 분파와 그 신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주로 현대문명을 배격하고 농촌공동체의 원형을 지키려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연극은 사건 자체보다 그 후 아미시 사람들의 대응에 주목한다. 그들은 사건 직후 바로 살해범을 용서한다고 밝히고 살해범의 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연극은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든다. 만일 당신의 딸이 저런 만행의 희생양이 됐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농장에 틀어박혀 지내는 광신도라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원작에선 한 명의 여배우가 그 모든 배역을 소화하지만 한국어 공연에선 일곱 명의 배우가 나온다. 그중 두 명은 만행에 희생된 아미시 소녀이고 나머지 다섯은 우유배달부였던 살인범(지현준)을 포함해 아미시 마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미시를 철저히 타자(他者)로 바라보는 우리를 대변한다.
공연 내내 아미시 사람들이 직접 나서 해명하는 법이 없다. 20년간 아미시의 친구로 지낸 교수(전정훈)가 길 안내를 맡고, 총격사건에 희생된 안나(정지은)와 벨다(이두리) 자매의 대화를 통해 관객이 스스로 그 의미를 재구성하도록 도울 뿐이다.
그것은 결코 광신이 아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짊어지려는 거룩한 선택이다.
하지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그를 이해하게 만드는 존재는 따로 있다. 바로 살해범의 아내 캐럴(구시연)이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범죄로 지독한 죄책감과 자기모멸감에 빠진 그는 자신과 두 아들을 돕기 위해 전국에서 모은 성금을 나눠주는 아미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패악질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안나와 벨다의 아버지가 새벽마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자식을 잃은 슬픔과 처절하게 씨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용서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를 깨닫는다.
연극을 보면서 실로 오랜만에 양 볼이 젖어들었다. 연극이 끝날 무렵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감정적 앙갚음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과 평화를 위해 분노와 슬픔을 자기 안에 갈무리할 줄 아는 아미시 사람들 중에 누가 더 문명인에 가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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