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봄햇살 얼굴 삐죽 내민 홍매화, 월출산 달빛에 잠 못 이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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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8일 03시 00분


강진 봄마중
다산 발자취를 따라 꽃이 피다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앞뜰 홍매화가 화르르 꽃등불을 매달았다. 검은 나뭇가지에 붉은 꽃을 토해냈다. 앙상한 뼈마디에서 어떻게 저런 황홀한 화엄세상을 만들어냈을까. 알싸한 봄바람에 매화향기가 콧속을 간질인다. 매화나무 뒤쪽으로 극락보전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맑고 화장기 하나 없는 절집. 있는 듯 없는 듯 무던하고 수수한 절집. 전혀 티를 내지않아 내 누님같은 절집.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스르르 평안해진다. 강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앞뜰 홍매화가 화르르 꽃등불을 매달았다. 검은 나뭇가지에 붉은 꽃을 토해냈다. 앙상한 뼈마디에서 어떻게 저런 황홀한 화엄세상을 만들어냈을까. 알싸한 봄바람에 매화향기가 콧속을 간질인다. 매화나무 뒤쪽으로 극락보전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맑고 화장기 하나 없는 절집. 있는 듯 없는 듯 무던하고 수수한 절집. 전혀 티를 내지않아 내 누님같은 절집.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스르르 평안해진다. 강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보겠다는 나인가 <고재종의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월출산은 우뚝우뚝 뼈로 서 있다. 너른 벌판에 홀연히 자리 잡고 있다. 나주 영암에선 우람한 월출산 등짝이 보인다. 씨름선수 등판 같다. 어깨 등뼈가 완강하다. 봉우리 암벽이 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밤새 얼었던 바위얼음이 봄 햇살에 파드닥거린다.

월출산(月出山)은 ‘달이 뜨는 산’이다. 달이 ‘두둥실 월출산 위로 떠오른다’는 뜻이다. 삐죽삐죽한 바위봉우리 어깨를 스치며 달이 솟는다. 달은 동쪽에서 뜬다. 서쪽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월출산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암 구림마을이나 도갑사가 바로 그곳이다. 구림마을과 도갑사는 결가부좌로 앉아있는 월출산 오른쪽 엉덩이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홍매에 취해 졸고 있는 참새.
홍매에 취해 졸고 있는 참새.
그렇다. 월출산이란 이름은 구림마을이나 도갑사 부근 사람들이 지었을 것이다. 마침 구림마을은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 국사(827∼898)가 태어난 곳이다. 백제 때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왕인박사(?∼?) 고향도 그 부근이다. 구림마을에서 보면 달은 월출산 왼쪽 어깨 위로 떠오른다. 봉우리바위마다 신비롭게 보일 수밖에 없다. 글자 그대로 ‘영암(靈巖)’이다.

강진에서 달은 월출산과는 전혀 관계없는 구강포쪽에서 뜬다. 강진사람들이 굳이 월출산이라고 지을 이유가 없다. 강진은 월출산 품에 안겨 있다.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臥牛形)이다. 월출산 북쪽은 영암이고 남쪽이 강진이다. 강진은 따뜻하다. 곤곤한 멸치젓갈 냄새의 갯벌과 짠물 냄새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강진에는 ‘월(月)’자로 시작되는 동네가 많다. 신월, 상월, 월남, 월하, 월송, 대월마을이 그렇다. ‘월(月)’은 월출산을 뜻한다. 월출산 남쪽마을이 ‘월남’이고 월출산 아래가 ‘월하’이다. 월남마을은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천년이 넘는 동네이다. 월남사 터엔 삼층석탑이 묵묵히 서 있다.

한낮 강진만 갯벌에서 죽지에 코를 박고 자고 있는 고니들. 고개를 들고 있는 오른쪽 두 마리가 보초이다.
한낮 강진만 갯벌에서 죽지에 코를 박고 자고 있는 고니들. 고개를 들고 있는 오른쪽 두 마리가 보초이다.
강진에서 월출산은 앞가슴 쪽이 보인다. 영암에서 보는 등 쪽이 굵고 뭉툭하다면, 강진에서 보는 앞쪽은 선이 가늘고 화려하다. 바위봉우리가 왕관처럼 뿅뿅뿅 솟았다.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천황봉(809m)은 그 정점이다.

강진의 봄은 색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황토는 촉촉이 젖어 더욱 붉다. 연둣빛 보리들이 우우우 종주먹질을 해댄다. 누런 강진만 갈대숲이 바람에 뒤척인다. 파릇파릇한 마늘밭이 싱그럽다. 강진만 넘어 겹겹이 이어지는 산과 산들이 아슴아슴하다. 검은 갯벌과 그 너머 바다가 뿌옇다. 들판 논두렁 불타는 냄새 고소하다. 저녁밥 짓는 냄새도 구수하다.

남포마을 입구∼해창마을까지 강진만 둑길을 따라가는 길(4km)은 온몸으로 봄바람 샤워를 하는 곳이다. 아직 돌아가지 않은 철새들이 갯벌에 코를 박고 있다. 고니 떼들이 한낮 갯벌에 엎드려 죽은 듯이 자고 있다. 보초 한 마리만 눈을 뜨고 경계를 편다. 해질녘이 되면 일제히 일어나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난다.
▼다산의 서러웠을 귀양길이련만··· 귤동리 가는 길은 꿈처럼 예뻐▼

1801년 겨울, 다산 정약용(1762∼1837)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은 나란히 남도 귀양길에 올랐다. 다산이 서른아홉, 약전이 마흔셋이었다. 음력 11월 21일 그들은 나주 금성산 아래 율정점(栗亭店) 삼거리주막에서 묵었다. 두 사람은 날이 밝으면 그곳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형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둘 다 잠이 올 리 없었다. 마침 주막 앞 나주 금성산은 한양 북한산과 그 모습이 흡사해 두 중년 사내의 마음을 울렸다.

“이랴! 이랴!” 암소로 밭갈이에 나선 농부.
“이랴! 이랴!” 암소로 밭갈이에 나선 농부.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의 푸르스름함이 꺼지려 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기만 했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만 터졌다’(정약용)

‘살아서는 증오한 율정점이여! 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간 꽃잎 같다오.’(정약전)

형제는 그 다음 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었다. 약용은 나주 영산강∼영암∼누릿재∼성전 삼거리를 거쳐 강진읍내에 도착했다. 약전은 흑산도 코앞 우이도에 잠시 있다가 본섬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정약용은 강진읍내 동문 밖 주막집에서 만 4년 동안(1801∼1805) 얹혀살았다. 처음엔 아무도 그를 살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오직 주막집 할머니만 그의 말벗이 돼 줬다.

‘방에 들어가서면서부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했다. 마침내 겨를을 얻었던 것이다. 난 침식을 잊으면서 공부에 빠져들었다.’

정약전은 술을 많이 마셨다. 사귐에 양반 상민 천민이 따로 없었다. 흑산도 어부는 물론이고 천한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나눴다. 양반이라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글 쓸 게 있으면 주저 않고 대신 써줬다. 섬사람들에게 단연 최고 인기스타였다. 너도나도 서로 자기 집에 모시려고 다투기까지 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틈 날 때마다 만덕산에 올라 흑산도 쪽 하늘을 바라보며 형을 그리워했다. 술 좋아하는 형이 늘 걱정이었다. 가끔 ‘형이 아파 누웠다’는 소식이 들렸다. 곧바로 ‘개를 잡아 먹으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형 성격에 말을 들을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1813년 정약전은 ‘동생이 곧 유배가 풀릴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흑산도 본섬에 살던 약전은 부리나케 다시 첫 거주지인 우이도로 나가 3년 가까이 살았다. 아우 곁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동생을 보지 못하고 6월 6일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약용은 형이 죽은 2년 뒤인 1818년 9월 귀양에서 풀려났다.


1805년 겨울, 정학연(1783∼1859)이 동문 밖 주막집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 정약용을 찾아왔다. 꿈에 그리던 5년 만의 부자 상봉. 아들은 앙상한 새끼당나귀에 의지해 천리 남도길을 내려왔다. 수염은 더부룩했고, 옷은 황토범벅이었다. 정약용은 가슴이 먹먹했다.

아버지가 물었다. “올해는 무슨 농사를 지었느냐?” 아들이 대답했다. “밤나무 옻나무를 심고, 배추와 겨자도 심었습니다. 마늘 몇 이랑 심었는데 풍년이 들어 그걸 시장에 내다 팔아 그것으로 노자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는 죄인의 몸. 우선 당장 아들 숙식부터 해결해야 했다.

‘귀양객에게 식구 하나 보태졌으니/내 재주로는 굶주림 구할 수 없어/…기구하게 절간에 찾아들어/구걸하는 안색이 비굴하네/다행히 반 칸짜리 방을 빌려/세 때 종소리를 아들과 함께 듣노라’

정약용은 그해 겨울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에서 큰아들과 함께 보냈다. 혜장 선사(1772∼1811)의 배려였다. 혜장은 나이가 다산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지만 학문 교류엔 나이가 문제되지 않았다.

정약용은 겨우내 큰아들에게 ‘주역’ ‘예기’를 문답을 통해 가르쳤다.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 ‘승암문답(僧庵問答)’이다. ‘절 암자에서 아들과 주고받은 문답’이란 뜻이다.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큰아들 손에 이 노트를 들려 보냈다. ‘집에 가거든 복습하고 익혀 네 아우의 스승이 되라’고 당부했다.

둘째 아들 학유(1786∼1855)는 1808년 4월 20일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있을 때 찾아왔다. 7년 만의 만남이었다. 귀양 당시 15세였던 학유는 수염이 덥수룩한 22세 청년이 돼 있었다. 처음엔 못 알아봤다. 모습은 아들이 분명한데, 수염이 나서 다른 사람 같았다. 학유는 술을 좋아해 강진에 있던 다산이 늘 걱정을 했었다. 작은아들은 후에 농가월령가를 지어 이름을 날렸다. 술을 좋아한 탓일까. 형 학연보다 4년 먼저 죽었다.

고성사와 다산초당에선 강진만이 한눈에 보인다. 강진만 갯벌은 봄물로 탱탱 불어 터졌다. 강진만은 ‘싸우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가는, 모두가 역동이요 생산성이다. 파도 위 갈매기는 출장 가는 군청 문화관광과장이다(김영남 시인)’.

혜장을 찾아 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오갔던 오솔길은 호젓하다. 솔바람 소리도 여전하다. 백련사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들도 우르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응달 동백꽃은 지난겨울 추위에 얼어 색이 바랬다.

백련사 아래엔 대안학교 ‘늦봄 문익환학교(2006년 개교 중고통합형)’가 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라는 돌비석이 눈에 띈다. 고성사에서 영랑생가까지 가는 길도 봄냄새가 물씬하다.

귤동리는 다산초당 아랫마을이다. 곽재구 시인은 그 귤동리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벽에 붙은 빛바랜 지명수배자 전단을 본다. 문득 다산 정약용이란 사내를 떠올린다.

‘정다산 1762년 경기 광주산/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전직 암행어사 목민관/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을 빙자한/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괴수’ (귤동리 일박).
▼“누릿재 넘으면 귤이 탱자로”▼

극락보전 오불도. 벽에서 떼어내 성보박물관에 별도보관.
극락보전 오불도. 벽에서 떼어내 성보박물관에 별도보관.
1801년 겨울, 귀양길에 나선 다산 정약용(1762∼1837)은 누릿재(황치·黃峙)에 닿았다. 누릿재는 영암과 강진을 가르는 황토고개. ‘강진 귤이 누릿재 넘어 영암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바로 그 고개다. 1840년 9월 추사 김정희(1786∼1856)도 바로 누릿재를 넘고 강진 해남을 거쳐 제주유배를 떠났다. 강진 해남 선비들의 한양 길도 그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정약용은 죄인 신분이었다. 발아래 강진읍내 초가집들이 굴 딱지처럼 닥지닥지 엎드려 있었다. 짭조름하고 알싸한 겨울 바닷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문득 오른쪽을 보니 월출산의 바위봉우리가 보였다. 마치 한양에서 보는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봉우리 같았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은지’

현재 누릿재는 우거진 나무와 풀로 지워졌다. 옛 서낭당 자리도 사라졌다. 월출산국립공원 야생화단지에서 흔적을 더듬어 올라가야 한다. 요즘은 동네 촌로들만 운동 삼아 넘나든다. 고개는 가파르지 않고 밋밋하다.

누릿재에서 내려오면 신월(新月), 상월(上月)마을이다. 그 아래가 바로 천년이 훨씬 넘은 월남마을이다. 큰 절집 월남사가 있었던 곳이다. 월남사 터는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다. 정약용도 누릿재에서 월남마을을 지나 무위사∼월하마을∼성전삼거리로 내려갔다. 누릿재∼성전삼거리는 약 15km 거리.

무위사(無爲寺)는 화장기 없는 절이다. 자연스러운 절집이다. 평평한 땅에 표가 나지 않는다. 평안하고 무던하다. 무위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불교에서 무위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모든 행동에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새가 하늘을 훨훨 나는 것과 같다.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은 소박하고 단아하다. 앞마당 홍매화가 화르르 붉은 꽃등불을 달았다. 극락전의 수월관음도 흰옷차림이 날아갈 듯하다.

mars@donga.com

▼먹을거리


▽강진 이슬식당(해물탕, 자연산장어) 061-432-5181. 병영 수인관(불고기백반 주꾸미 전문·사진) 4인 한 상 2만4000원. 061-432-1027, 해태식당(한정식 061-434-2486) 4인 한 상 10만 원.

▼교통

▽KTX=서울용산∼광주(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진행 버스), 서울용산∼목포(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진행 버스), 서울용산∼나주(나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진행 버스)

▽고속버스=서울강남고속버스터미널 하루 6회(5시간 20분 소요)

▽승용차=서울∼서해안고속도로∼목포∼영산하굿둑∼영암방조제∼국도 77호선∼강진, 서울∼호남고속도로∼광주광산나들목∼국도 13호선∼나주∼영암∼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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