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떠있는 붉은색의 유기체, 벽 뒤에서 얼굴만 빠끔히 내민 남녀, 행성의 배열인 양 일렬로 자리한 오렌지, 만화 속 인물과 액세서리 등 밝고 경쾌한 이미지가 들어찬 분홍 그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 1층에서 열리는 김광열 씨(48)의 ‘Black, White & Pink’전에선 상상과 현실이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감성을 빚어낸다. 한 사람의 작업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세계를 펼치면서도 모든 작품이 자아에 대한 탐구, 자신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된다.
1991년 그림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건너간 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하는 ‘커밍아웃’ 격의 전시다. 동성애자인 작가는 “항상 나 자신에 대해 숨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실내공간이나 벽 속에 갇힌 인물 이미지가 많이 담겨 있다”며 “그런 장애물을 뛰어넘고 싶은 욕망이 작업으로 표현된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드러내기 힘든, 자기 안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성 정체성이라는 극히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공감의 폭이 넓은 전시다.
○ 은폐된 진실을 찾아서
김 씨는 “나 자신을 속이고 사는 동안 가면을 쓰고 사는 것처럼 두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어딘가에 갇힌 생명체, 양초, 오렌지, 죽은 나방 등을 담은 초기작의 경우 다수에게 익숙한 문화규범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을 쓸쓸하고 고립된 이미지로 그려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게이의 식별표지로 분홍빛 배지를 달게 한 것을 연상시키듯 분홍 옷을 걸친 사람들은 울 듯 말 듯한 표정이다.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심리적 갈등을 털어낸 근작에선 슬픔과 분노, 두려움 대신 순수한 미적 세계에 대한 오래된 동경이 되살아난다. ‘편안한 구도와 불안한 구도, 어질러짐과 정돈됨, 순진함과 세련됨’이 혼재된 그림엔 터널의 끝을 빠져나온 듯 천진하고 달콤한 상상이 스며 있다.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형상화한 전시를 보고 일민미술관 2층으로 가면 도시의 표면과 이면에 초점을 맞춘 사진전을 볼 수 있다. 금혜원 씨(32)의 ‘URBAN DEPTH-都深’전으로 우리가 지나치거나 망각하고 지내는 도시의 깊은 곳을 찾아가 그 본질적 모습과 움직임을 사진으로 채집한 전시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집 주변의 재개발 현장을 접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에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파란 천막을 덮어놓은 재개발 현장, 도심 한복판의 지하에 자리한 쓰레기 처리시설은 도시의 깊숙한 이면을 다시 보게 한다.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 풍경을 두루마리 산수처럼 길게 이어붙인 사진의 경우 도시의 물리적 표면과 은폐된 공간의 거리를 일깨워준다. 두 전시는 5월 8일까지. 02-2020-2055
○ 숨겨진 이면을 찾아서
이들과 다른 맥락에서 중견작가 도윤희 씨(50)의 ‘Unknown signal’전은 삶의 이면을 섬세하게 응시한다. 현상 뒤편에서 발견되지 않는 미세한 일상의 결,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업과 만날 수 있다. 4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02-2287-3500).
작가는 “현실 뒤에 숨겨진 것들, 일상적인 것의 갱도 아래 무엇이 스며있는지 묻고 대답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새벽이 밀려와 밤이 흩어지는 모습을 표현한 ‘백색어둠’, 강한 빛을 접해 순간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은유한 ‘어떤 시간은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등은 모순과 양면성이 공존하는 삶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손맛과 서정성이 담긴 드로잉에도 눈길이 간다. 특히 캄보디아 여행에서 만난 강물을 디지털 프린트와 조명으로 재현한 작품이 인상적이다. 바람의 지문이 스며들어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이 손에 잡힐 듯하다.
보이는 것과 숨겨진 모습의 차이를 파고든 알찬 전시들이다. 익숙함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현대미술의 매력을 보여주면서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