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孫丑(공손추)가 스승께서 제나라에서 정치를 담당한다면 管仲(관중)과 晏子(안자)가 그랬듯이 (패,백)業(패업)을 이룰 수 있느냐고 묻자 맹자는 그의 편협한 관점을 꾸짖었다. 그러면서 曾西(증서)와 어떤 사람의 대화를 인용해 자신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혹자가 증서에게 ‘그대는 子路(자로)와 비교해서 누가 더 어진가?’라고 묻자 증서는 ‘자로는 돌아가신 어른께서 존경하신 분이다’라고 대답해서, 자기는 자로에게 견줄 인물이 못 된다고 謙退(겸퇴)했다. 이어서 혹자가 ‘그대는 관중과 비교하여 누가 더 어진가?’라고 물었는데, 증서는 발끈하여 위와 같이 대답했다.
孰賢은 ‘누가 어진가, 나은가’이다. (발,불)然(불연)은 발끈하는 모습이다. 爾는 2인칭이다. 何曾은 何乃(하내)와 같아 ‘어째서’의 뜻을 나타낸다. 予는 1인칭이다. ‘管仲得君이 如彼其專也라’는 관중이 제나라 환공의 신임을 얻어 정치를 專斷(전단)했던 것을 가리킨다. ‘行乎國政이 如彼其久也라’는 관중이 국정을 맡아 행한 것이 40여 년에 이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功烈이 如彼其卑也라’는 관중이 覇術(패술)에만 능했고 王道(왕도)를 몰랐다고 비판한 말이다. 是는 ‘이 사람’, 곧 관중을 가리킨다.
공자는 자로에 대해 ‘千乘(천승)의 나라에서 賦(부·토지세로서 병사를 내는 일)를 맡아보게 할 만하다’라고 논평했다. 관자에 대해서는 ‘제나라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되 무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백성들에게 利澤(이택)을 끼친 실적을 보면 확실히 관중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공자와 그 문하에서는 관중의 사업이 仁義(인의)의 이념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증서도 仲尼(중니·공자)의 무리였기에, 혹자가 자신을 관중에게 견주자 기뻐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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