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말 잘하고 싶나요? 부담감부터 내려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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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5일 03시 00분


■ 말 잘하라고 등 떠미는 시대의 생존법


숨죽인 채 나만을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동자. 그리고 마이크. 드디어 입을 연다. 하지만….

“더, 더, 더, 더….”

한 단어도 채 내뱉지 못한다.

올해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이다. 말더듬증이 있는 요크 공작(조지 6세로, 현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카메라를 2011년 대한민국으로 돌려 보자.

반장 선거 후보연설에 나선 초등학생부터 입사 면접을 보는 대학생, 사업을 따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직장인, 그리고 임직원들에게 연설하는 최고경영자(CEO)까지. 어느 순간 ‘말하기’가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말하기는 때로 인생의 중대 기로에서 운명을 바꿔 놓기까지 한다. 스피치 기법을 담은 책이 쏟아지고 스피치 학원이 번성하는 현실은 수많은 ‘한국판 조지 6세’들이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말하기 공식’에 짓눌린 한국

한국사회는 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말 잘하는 사람은 사기꾼’, ‘입만 살았다’, ‘말만 번지르르’ 등과 같은 표현이 이를 반영한다. 김미경 아트스피치연구원 대표는 “한국은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보다는 ‘침묵은 금이다’라는 쪽에 훨씬 무게를 둔 사회”라고 분석했다. 당연히 말하기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말을 잘하라’고 등 떠미는 사회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늘었다. 이 때문에 이런저런 ‘말하기 공식’도 생겨났다. 골프 대화법, 엘리베이터 대화법, 건배사 등을 찾아 외우는 사람은 물론이고 연설에 사용하기 위해 부하 직원에게 요즘 ‘뜨는’ 유머를 찾아오라고 지시하는 CEO도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스피치 학원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 나갈 학생에게 연설을 시작할 때 “○○○(담임교사 이름)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라며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남자 주인공 현빈이 했던 대사를 사용해 웃음을 유도하도록 가르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달달 외우다 보니 입사 면접 때 지원자들이 특정 질문에 똑같은 답을 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한 기업의 임원은 “채용 인터뷰에서 여성 지원자에게 ‘남자 친구가 있느냐’라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있었는데 몇 달 전 헤어졌다’고 답한다”고 말했다. 면접 가이드에 ‘남자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면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찍히고, 현재 남자친구가 있다면 곧 결혼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준다’며 이렇게 답하라고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기에 대해 고민하는 직종도 늘어나고 있다. 설교만 시작하면 신도들이 졸기 시작한다고 털어놓는 목사, 환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병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지 고민하는 의사는 물론이고 복잡한 숫자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회계사도 있다. 법정에 선 사람들이 진실하게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말하기 방식에 신경 쓰는 판사도 있다. 이공계 분야의 연구원들 역시 복잡한 이론이나 연구 결과를 정책 담당자나 대중에게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능력을 요구받고 있다.

○ 간결하게, 자연스럽게, 진솔하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말을 잘하는 것일까.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말하기 역시 시대에 따라 선호하는 방식이 바뀌어 왔다. 전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쳐야 했다. 30대 이상이라면 초등학교 시절 웅변대회 때 주먹 쥔 두 손을 차례로 들어 올리며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라고 부르짖던 친구들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용도 고사성어나 유명한 시, 유명인의 말 등을 인용해 길게 말해야 말을 잘하는 것으로 여겼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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