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는 仁義(인의)의 이념을 내세우는 王道보다는 부국강병을 통해 자국을 번영케 하는 (패,백)術(패술)이 선호되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맹자의 제자 公孫丑(공손추)조차도 스승께서 제나라의 정치를 담당한다면 管仲(관중)과 晏子(안자)처럼 업적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맹자는 曾西(증서)와 어떤 사람의 대화를 인용해서 속내를 드러냈다. 맹자가 인용한 말에 따르면, 혹자가 ‘그대는 子路(자로)와 비교해서 누가 더 어진가?’라고 묻자, 증서는 ‘자로는 돌아가신 어른께서 존경하신 분이시다’라고 대답하면서 謙退(겸퇴)했다. 이어서 혹자가 ‘그대는 관중과 비교하여 누가 더 어진가?’라고 물었는데, 이때 증서는 ‘너는 어째서 나를 관중에게 견주는가?’라고 책망했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專斷(전단)했고 국정을 맡아본 것이 40여 년이나 되었건만 그가 남긴 功烈(공렬, 업적)은 대단히 낮았다고 비판한 것이다.
曰은 다시 맹자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앞서 증서와 다른 사람의 대화문을 길게 인용한 다음이라서 이 글자를 넣어 맹자의 말이 시작됨을 표시한 것이다. 所不爲는 所不爲願의 준말로, ‘바람으로 삼지 않는 바’, 곧 ‘바라지 않는 바’란 뜻을 지닌다. 而는 역접 접속사, 子는 이인칭 대명사이다. 爲我는 ‘나를 위해’이되, 실제 뜻은 ‘나에 대해’이다. 願之의 之는 ‘관중처럼 되는 일’을 가리킨다.
‘논어’ ‘憲問(헌문)’에 보면 ‘晉(진)나라 文公(문공)은 교활한 술수를 쓰고 정의로운 방법을 쓰지 않았으나 齊(제)나라 桓公(환공)은 정의로운 방법을 쓰고 교활한 술수는 쓰지 않았다’고 하여, 춘추시대 覇者(패자)들 가운데 문공은 謀略(모략)이 많았으나 환공은 正道를 밟았다고 평했다. 하지만 맹자는 ‘仲尼(중니, 공자)의 무리는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고, 주자(朱子)는 환공이나 문공이나 모두 무력을 쓰면서 仁을 빌려왔으므로 본마음이 不正했다고 비판했다. 맹자나 주자의 견해를 따르면 제나라 환공을 보좌한 관중은 더욱 不正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나 주자가 편협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 시대를 바로잡을 목적에서 패술을 더욱 가혹하게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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