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가 얼토당토않은 분란에 휩싸일 때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독도를 갔고, 무엇을 보았고, 그곳에서 무슨 고기를 잡아 어떻게 회를 쳐 먹었는지 등등 독도와 관련한 생활사가 속속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을 텐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금이라도 그런 기록을 남기자는 심정에서 저자는 독도로 갔다.
대구 매일신문 20년차 편집기자인 저자는 2008년 7월 14일 일본이 중학교 ‘새학습지도 요령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 영토’로 표현하는 억지주장을 펼친 다음 날 1년 동안 독도상주기자로 살 결심을 굳혔고, 2008년 9월부터 2009년 8월까지 독도에 거주했다. 자신의 기록이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기를 바라면서.
‘18만7천 제곱미터(5만4723평), 여의도 광장의 절반. 동도, 서도 두 개 큰 섬과 89개 부속도서. 해발 최고 고도 서도 최고봉 168미터. 일본의 도발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의 상징이 되어 버린 섬….’
저자에게도 이같이 추상적인 존재였던 독도는 여객선 삼봉호 갑판에서 내리기 직전부터 피부에 와 닿는 현실 속의 독도가 됐다. 독도에는 관광객용 화장실이 없으니 배 안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한 뒤 내리라는 ‘이상한’ 안내방송, 하선한 후에도 독도경비대가 있는 동도 계단을 오를 수 없고, 나루터 옆 자갈밭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설명…. 시작부터 독도는 뭍과는 달랐다.
일상을 영위하는 방식도 낯설었다. 숙소가 부족해 첫날 밤은 독도 김성도 이장 내외의 방에서 신세를 졌다. 전기는 석유를 이용한 발전기로 밤에만 사용하고 물은 해수담수화시설로 만들어 사용한다. 독도의 대중교통은 모터보트. 서도에서 동도로 가거나 짐을 나르고 어로활동을 할 때도 모터보트를 이용한다.
낮에 더워서 서너 번이나 물에 뛰어들다가도 저녁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밤에는 보일러를 틀어야 했다. 거주지로 삼은 어업인 숙소 계단 밑까지 이어진 해식(海蝕)동굴로 하루 종일 천둥소리를 내는 파도가 드나들어 밤에 잠을 청하기도 어렵다. 가짜 미끼를 덥석 무는 사배기(방어의 일종을 지칭하는 울릉·독도 방언)를 잡는 것은 ‘낚는 것’이 아니라 ‘건지는’ 수준이지만 욕심낼 일도 없다. 전복은 밥공기 뚜껑만 한 것이 새끼 취급을 받아 접시만 한 것만 따낸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한겨울 추위도, 주먹만 한 돌도 휙휙 날려버린다는 해풍도, 무엇보다도 감옥소 징벌 독방과 같은 고독”도 독도의 일부로 저자는 몸에 새겼다.
저자는 독도를 찬찬히 뜯어보기도 잊지 않는다. 유인도의 조건으로 흔히 얘기하는 담수(淡水)도 ‘못골’이라는 동굴에서 하루 20∼30명은 넉넉히 먹을 정도로 난다. 김성도 이장 내외를 비롯해 등대소 직원, 독도경비대원들은 풀 한 포기, 바윗돌 한 개, 심지어 물속의 혹돔까지도 친구로 여기며 생활하고 있다고도 전한다.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죽도(竹島)로 부르지만 독도에는 대나무가 없다는 사실, 3월이면 앞바다가 괭이갈매기들의 세상으로 바뀌는 자연환경도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원래는 바다사자인 강치도 살았지만 33년 전부터는 나타났다는 보고가 없고 이따금 물개와 물범만 발견된다며 안타까워한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사실(史實)도 놓치지 않고 정리했다. 조선시대 이후부터 독도는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돼 각종 기록에 무수히 등장했다.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동래 사람 안용복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와 고기잡이하는 것을 알고 일본에 건너가 막부에 항의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했다. 1877년 일본 국정 최고기관인 태정관이 ‘죽도(당시 울릉도를 지칭) 외 한 섬(독도)에 대하여 일본은 관계가 없다’고 명시한 사실과 일본이 1905년 2월 강치잡이 업자 ‘나카이’를 앞세워 시마네 현의 고시를 통해 일방적으로 독도를 일본 땅으로 편입했다는 침탈 과정도 상세히 적었다.
우리 정부에 대한 바람도 저자는 빠뜨리지 않았다. 독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 우선적으로 시설물 공사부터 하고 잠잠해지면 유지 관리나 보수는 뒷전이라는 지적이다. “시행 주체별로 각각 사업을 벌이다 보니 봄부터 가을까지 독도는 늘 공사 중일 수밖에 없다. 좁은 터에 50여 년간 쌓았다 허물기를 되풀이하다 보니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기암괴석 절경에 시멘트가 더께로 발라져 방치되어 있고, 철근들은 삭은 채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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