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행복한 가정’… 그 위선의 아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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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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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연극 ‘내가 까마귀였을 때’
대본★★★★ 연출★★★☆ 연기★★★☆ 무대★★★☆

우리가 까맣게 잊고 살던 외환위기의 아픈 상흔을 불쑥 꺼내드는 연극 ‘내가 까마귀였을 때’. 13년 만에 돌아온 막내아들(윤정욱·왼쪽)에게 ‘잃어버린 13년’
을 보상해주지 못해 어머니(손봉숙)는 어쩔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망쳐놔야 직성이 풀리는 동생의 실체에 누나(서은경)는 두려움을 느낀다. 극단 산울림 제공
우리가 까맣게 잊고 살던 외환위기의 아픈 상흔을 불쑥 꺼내드는 연극 ‘내가 까마귀였을 때’. 13년 만에 돌아온 막내아들(윤정욱·왼쪽)에게 ‘잃어버린 13년’ 을 보상해주지 못해 어머니(손봉숙)는 어쩔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망쳐놔야 직성이 풀리는 동생의 실체에 누나(서은경)는 두려움을 느낀다. 극단 산울림 제공
종이에 손가락을 베었을 때의 아픔이 느껴졌다. 나를 베는 흉기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종이가 무방비의 속살을 파고들 때 상대를 못 찾아 속에서 맴도는 분노. 하얗게 질린 피부 사이로 배어 나오는 비릿한 피를 입으로 빨며 느끼는 아찔한 현기증. 창작극 ‘내가 까마귀였을 때’(고연옥 작, 임영웅 연출)가 빚어내는 감정의 진폭이다.

우리네 무수한 소극장연극처럼 이 작품은 다시 가족을 이야기한다. 처음엔 벅찬 기쁨을 안고. 13년 전 놀이공원에서 잃어버렸던 막내아들(윤정욱)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가족은 막내를 잃어버린 것 빼곤 부족할 게 없어 보인다. 첫째인 누나(서은경)는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다가 명문대 법대생이 된 엘리트다. 둘째인 형(윤영성)은 고교 졸업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바른 청년. 아버지(고인배)와 어머니(손봉숙)는 그걸 감사하게 여기며 법 없이도 살아갈 만한 사람들이다.

그들 인생의 유일한 가시였던 막내아들의 귀환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더없는 만족감을 표하는 부모와 달리 누나와 형의 얼굴엔 알 듯 말 듯한 그늘이 스친다. 그 불안의 정체는 보육원을 전전하면서 경찰서를 수없이 드나들었다는 막내의 일탈행위로 스멀스멀 형태를 갖춰간다.

처음엔 자신을 찾아줘서 너무 고맙다고 울먹이던 녀석이 표변한다. 먹을 것만 보면 훔친다고 ‘까마귀’로 불린 망나니였다는 그는 “나처럼 살면 누구라도 이렇게 돼. 뭐든지 너무 멀쩡해 보이는 건 깨부수고 싶어”라며 악마적 본성을 드러낸다.

“너를 찾아내기 위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힘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누나를 향해 “최고로 살기 위해 핑곗거리가 필요했던 것 아니냐”고 힐문한다. 또 자신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집을 지으러 다녔다는 형에겐 “자기 자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 아는 척하는 게 문제”라고 조롱을 퍼붓는다. 행복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조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불행의 씨앗이 돼버린다.

의당 자신이 누렸어야 할 몫을 누나와 형에게 뺏겼다고 생각한 막내의 원한의 담쟁이덩굴이 단란해 보이던 가정을 뒤덮어간다. 결국 누나와 형의 인내가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 이 집안을 덮고 있던 진짜 불안의 정체가 밝혀진다. 13년 전 외환위기와 얽힌 가족사의 비밀이다.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2년 전 임영웅 씨가 연출했던 유진 오닐 원작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떠올리게 한다. 부모 형제간의 알 듯 말 듯한 불화의 이면에 숨어있는 가족사의 비밀이 충격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족들 사이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 함정이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연극 속 삼남매는 프랑스 철학자 라캉이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와 기막히게 대응한다는 점이다. 가장 현실적이면서 논리 정연한 누나는 법과 규범의 지배를 받는 상징계를 대변한다.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한 형은 상상 속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꿈꾸는 상상계에 속한 존재다. 그리고 막내는 상징계와 상상계가 포착할 수 없는 안갯속의 존재이면서 현실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재계를 대변한다.

실재는 항상 상상계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위협적으로 등장해 상징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사라진다. 연극 속 막내가 형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기억의 허구성을 드러내면서 누나가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놓고 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삼남매의 팽팽한 긴장 속에 펼쳐지던 스릴러가 용서와 화해의 멜로드라마로 너무 쉽게 안착한다는 점이다. 삼남매의 차가운 심리연기와 부모의 감상적 감정연기가 뒤섞인 점도 이질감을 형성한다.

그런 이 작품의 균형을 잡아준 것이 서은경 씨의 안정적 연기라면 작품 전체에 생동감을 부여한 것은 신인배우라고 믿어지지 않는 윤정욱 씨의 표정연기였다. 꼬리 감춘 악마와 날개 잃은 천사의 이중성을 동시에 연기해낸 윤 씨의 연기야말로 이 작품 최고의 수확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1만5000∼3만 원. 5월 8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02-33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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