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 씨는 2000년대 한국 연극계의 에이스다.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너무 놀라지 마라’로 이어지는 그의 창작극들은 야구에 비유하자면 방어율(비평)과 승수(흥행)에서 모두 놀라운 성취를 이뤄냈다. 비결이 뭘까. ‘정통파 투수’의 묵직한 직구와 ‘기교파 투수’의 기막힌 변화구를 함께 갖췄기 때문이다.
묵직한 직구는 두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어울리는 가족극으로 승부를 건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가족이란 창을 통해 한국 사회의 위선과 가식을 고발한다는 점이다. 기막힌 변화구는 그 직구에 낙차 큰 변화를 주는 것이다. 첫째는 볼 같은 스트라이크다. 그의 연극 속 가족은 우리 사회의 통념과 한창 어긋난 가족이어서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어느새 우리가 감추려 했던 본 모습임이 드러난다. 둘째는 스트라이크 같은 볼이다. 정색하고 비판하기보다는 폐부를 파고드는 블랙코미디로 구석을 찌른다.
그런 그가 서울시극단과 손잡고 연출한 번역극 ‘햄릿’(정진수 번역)은 어떤 모습일까. 역시 자기 스타일대로 덴마크 중세 왕가의 비극을 현대적 가족극으로 풀어낸다. 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역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한 삼촌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조카이자 양아들의 ‘끝장 드라마’ 아니던가.
두 번째 직구도 등장한다. 현대적 복장을 갖춘 배우들은 컨테이너 2개를 쌓아놓은 공간 앞에서 패륜과 불륜으로 얼룩진 가족사의 비극을 연기한다. 첫 장면에서 햄릿(강신구)은 “여기는 광장. 내 아버지의 죽음이 서려 있는 곳. 저 거대한 컨테이너 성벽 위에서 매일 밤 불꽃놀이 축제가 벌어진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라며 연극의 내용을 한국의 현실과 포개놓는다.
불꽃놀이는 촛불시위의, 컨테이너 성벽은 이른바 ‘명박산성’의 풍자다. 그렇다면 햄릿의 아버지(주성환)는 누구이고, 그를 살해한 클로디어스(황성대)는 누구일까. 연극은 이를 직접 노출하진 않는다. 분명한 것은 클로디어스가 부패한 정치권력 일반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연극에선 햄릿은 사적인 복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만악(萬惡)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클로디어스를 제거하려다 원작과 달리 클로디어스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햄릿을 죽인 클로디어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불온한 생각이, 불온한 의심이 햄릿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박근형의 햄릿은 결국 꽃 시절 한번 못 겪고 스러져가는 이 땅의 무력한 청춘을 상징한다. 하지만 번역극인 탓인가 이번 공연에선 ‘볼 같은 스트라이크’나 ‘스트라이크 같은 볼’이 잘 보이질 않는다. 정직한 직구만 있을 뿐이다.
강신구 씨가 연기한 햄릿은 복수에도 실패하는 무력한 청춘이라고 하기엔 너무 노회해 작품 전체 흐름과 동떨어진 이미지 충돌을 낳았다. 반면 클로디어스 역의 황성대 씨는 신인답지 않게 묵직한 발성과 당찬 연기로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컨테이너 두 개를 쌓아놓은 공간을 때론 성벽으로 때론 다양한 실내공간으로 변형시키며 중극장 무대를 채워간 무대 연출도 인상적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2만∼3만 원.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02-399-1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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