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1>KAIST학생들의 자살사태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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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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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영재들이 거목으로 자랄 기회, 스스로 꺾고 있는 건 아닌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994년 혹은 1995년의 일로 기억난다. 마침내 선생님이 되는 데 성공한 친구는 무척 흥분되어 있었다. 하긴 자신의 학창시절 느꼈던 것, 혹은 바뀌었으면 하는 것들을 이제 선생님이 되어 실현할 수 있다니 흥분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세상은 바뀐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하는 친구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학기가 지난 뒤, 나는 무엇인가 달라진 모습을 친구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초보 선생님으로서의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친구는 교직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학교도 엄연한 조직생활이고 당연히 초보 선생님은 군대로 따지면 이등병에 지나지 않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은 자신만의 논리로 움직이기 마련이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내 충고를 듣고 친구는 쓰디쓴 미소를 짓는다. 그 정도는 자신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친구는 자신의 고민이 동료 선생님이나 선배 선생님과의 관계 문제에 있지 않다고 한숨을 내뱉었다.

친구는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 고뇌하고 있었다. 새로 담임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성적으로 서열을 매기는 학급 분위기를 일소하려고 하였다. 어차피 일등에서부터 꼴등까지 정해지는 성적 경쟁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한두 명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이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친구는 학창시절의 열등감이 얼마나 집요하게 평생을 따라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큼이나 글을 잘 쓰는 학생, 운동을 잘하는 학생, 그리고 노래와 춤에 능숙한 학생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내 친구는 모두가 자신의 일에서 일등일 수 있다는 자부심을 키워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물론 학급 분위기는 어느새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일이 그에게 일어나게 된다. 반에서 일등을 독차지했으며 전교에서도 항상 1, 2등을 다투던 아이가 어느 날 면담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다짜고짜 전학을 요구했다. 부모님과의 상의는 모두 끝났다고 하면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친구는 그 아이가 학교생활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는 전학을 결정한 진정한 이유를 알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와 그의 부모가 전학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성적만으로 인정을 받아왔던 제자와 그의 가족들은 내 친구의 개혁 조치가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제자는 지금까지 자기보다 공부를 못하던 동료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인정받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로 인정의 서열이 결정되는 학교로 전학하려고 결정한 것이다. KAIST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자기의 동료들이 나름대로의 능력에 따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내 친구의 제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당돌했던 내 친구의 제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인정을 받으려면 오직 성적만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믿고 있던 그 아이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렇지만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 친구의 제자처럼 상위 0.5%의 성적을 가진 아이들, 과학 영재라고 인정받으며 KAIST에 입학했던 아이들이 연이어 자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 성적이라면, 이것은 일부 소수의 아이들만이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일등을 하지 못한 아이들은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자존감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하게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좌절하게 되고, 그것이 마침내 자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일등은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KAIST 학생들을 자살하도록 만든 일차적 책임은 성적제일주의를 제도화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이 아직 학생이라는 점에서 학부모와 학교 당국은 깊게 반성할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기도 하다. 성적을 유일한 인정 수단으로 강제하는 외적인 힘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던 책임, 이것은 분명 KAIST 학생들이 떠맡아야 할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주체가 기성세대이고 대상이 학생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당당하게 성적제일주의로 몰고 가는 기성세대에 저항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성적제일주의를 수용했던 것 아닐까?

인정이 선행한다는 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사고 도식과 편견들에 의해 우리가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도 그런 사실에 대한 주의는 상실될 수 있다. 이런 한에서 이 경우에는 ‘망각’이 아니라 ‘부정’ 혹은 ‘방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수도 있겠다. ―‘물화: 인정이론적 탐구(Verdinglichung: Eine anerkennungstheoretische Studie)’

인간은 인정을 먹고 자란다고 주장했던 호네트(Axel Honneth·1949년 출생)의 이야기다. KAIST에 입학할 정도라면 성적제일주의가 모든 사람이 인정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이자 편견이라는 사실쯤은 알아차릴 만한 지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성적이 나빴던 중고등학교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제일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교육당국이 성급하게 자신들의 배를 갈라 황금 알을 얻으려 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배를 갈라서 죽을 일은 아니다. 누가 우리 과학 영재들을 이렇게 어리석고 약하게 키웠는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은 열정적인 호기심과 자발적 노력의 성과다. 낙제를 밥 먹듯이 했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을 생각해 보라. 과학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성적을 유일한 인정 수단으로 강제하는 외적인 힘에 저항해야만 했다. 그것은 자살이란 자기 파괴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될 일이 아니다.

한때 교육과학부로 통폐합되기 전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불렸던 적이 있다. 각 개인을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인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자원으로 보는 발상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자살한 KAIST 학생들이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성의 힘과 인문학적 열정으로 저항하기 힘들다면, 나는 우리 학생들이 장자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숙고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머리를 들어 나무의 가는 가지들을 보니 모두 꾸불꾸불하여 서까래나 기둥이 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숙여 나무의 등걸을 보니 속이 텅 비어 관을 만들 재목이 될 수가 없었다. 잎을 씹어 보니 입이 얼얼해지고 상처가 났다. 나무의 냄새를 맡아 보니 사람을 심하게 취하도록 하여 사흘이나 깨어나지 않게 하였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과연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不材之木☆☆)’여서 이렇게 크게 자랄 수가 있었구나. ―‘장자(莊子)’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운명도 바뀌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또한 최상위급 대학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려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KAIST 학생들에게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도처에서 경쟁과 업적이 전가의 보도처럼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적제일주의라는 잘못된 편견, 혹은 과학 천재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탈출구를 도모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 이 대목에서 재목으로 쓰이지 않아야 나무는 크게 자랄 수 있다는 장자의 통찰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재목으로 쓰이기 힘들다고 자살하는 나무는 정상적인 나무일 수 있는가? 이제 자신은 재목이기 때문에 인정받는다는 해묵은 편견을 버릴 때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 학생들은 황금 알을 낳을 기미를 보이면 배를 가르려고 덤벼드는 기성세대들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목으로 쓰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은 거대한 나무로 자랄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왠지 오늘 교직을 오래전 떠난 내 친구의 얼굴이 더욱 그리워진다. 먼저 떠난 우리 소중한 학생들의 영전에 내 친구와 함께 삼가 조의를 표한다.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경쟁(競爭·competition)☆

공존과 공감을 부르짖으면서도 아직도 우리는 경쟁을 통해 인간과 사회가 발전한다는 낡은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다. 경쟁은 자유로운 교류와 연대를 가로막고 인간을 고립화시키는 주범이다. 경쟁을 제도화했을 때, 경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은 실패의 책임을 자신이 떠안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했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부끄럽게도 우리가 자살률 1위를 자랑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경쟁을 지고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소통과 연결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는 경쟁이 가진 유용성이란 신화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부재지목(不材之木)☆☆

곧지 않고 복잡하게 꼬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나무를 뜻하는 ‘산목(散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시대 사상가들이 사회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했을 때, 장자만은 개인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고 긍정했던 철학자였다. 개체의 단독적인 삶을 강조했던 장자의 정신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명령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기성세대들이 깊이 새겨볼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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