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떡차를 만드는 법을 기록
으로 남겼다.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세 번 쪄서 세 번 말려 가루를 내는 방식
도 설명했다. 옛 방식으로 재현한 떡차.
김영사 제공
우리의 전통 차 문화를 논할 때 초의(草衣·1786∼1866) 선사는 항상 정점에 위치해 왔다. 초의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에 우리 차 문화를 부흥시킨 승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때 흥했다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명맥이 끊길 정도로 쇠락했던 조선의 차 문화를 부흥시킨 인물은 초의만이 아니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최근 차와 관련된 간찰과 시, 문집 소장자를 일일이 찾아가 자료를 발굴해 조선 후기 차 문화사를 정비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를 펴냈다.
정 교수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초의에게 제다법(製茶法)을 가르쳤고, 초의는 탁월하게 차를 만들어 조선 차를 널리 퍼뜨렸으며 그 ‘초의차’에 매료돼 명성을 드높인 이는 추사 김정희(1786∼1856)였다”며 “조선 후기 차 문화는 다산과 초의, 추사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조선조에서 차는 배탈이 났을 때나 먹는 상비약이었지 기호음료와는 거리가 멀었다. 연행 길에 사온 중국차를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고, 국내에서 나는 차는 생산량이 적어 공물로 바쳐지는 게 거의 전부였다.
정 교수는 일부 차 소개 책자에는 초의 선사가 다산에게 제다법을 가르쳐준 것으로 나와 있는데, 사실은 그 반대라고 지적했다. 차 애호가 사이에서 초의 선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모든 것을 선양하려다 빚어진 결과라는 것.
“전국을 찾아다니며 배움을 구하던 전남 해남 대둔사의 젊은 승려 초의가 1809년 전남 강진의 다산을 찾아와 배움을 구합니다. 그때 다산이 48세, 초의는 24세였습니다. 다산은 초의에게 유학을 가르쳤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알고 있던 차 만드는 법도 가르쳤습니다.”
당시 다산이 만들었던 차는 떡차였다. 1830년 다신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는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서 간 뒤 이를 뭉쳐 만드는 떡차 제조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물론 초의 선사가 만들었던 것도 떡차로 오늘날의 잎차와는 다른 형태였다.
초의차는 1830년경 서울의 경화세족들로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맛이 뛰어나 초의 선사에게서 차를 선물 받으면 글이나 그림을 보내는 이가 많았다. 당대의 명필가 추사는 초의차에 매료된 대표적 인물로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차 얘기를 빼면 남는 게 없을 정도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시절에도 차를 보내 달라고 초의에게 부탁했을 정도였다. 습기가 많은 장마철에는 상하지 않도록 항아리에 밀봉해서 보내줄 것을 각별히 부탁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다산과 초의, 추사뿐만 아니라 18세기 고창 선운사 차밭의 존재를 알고 그 찻잎으로 7종향차를 만들고 그 방법을 기록한 부안현감 이운해(1710∼?), 진도로 귀양을 갔다가 차 전문서인 ‘동다기’를 지은 이덕리(1728∼?) 등 차와 관련된 주요 인물과 그들의 사료도 실었다. 또 초의가 우리 차의 역사와 효용,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 등을 쓴 ‘동다송’은 여러 수가 아닌 한 편의 시라는 사실 등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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