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뉴타운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해장국집 대중옥 사장 이백만 씨. 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오전 4시 통금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무교동 고고클럽 ‘코파카바나’를 빠져나왔다. 밤새 신나게 흔들어 피곤한 몸에 하품을 연방 해대며 택시에 올라탔다. 청계고가를 타고 신설동 램프에서 빠져 왕십리 ‘대중옥’까지 가는 데는 채 10분이 안 걸렸다. 골목 어귀에 접어들면 막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가는 주인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면 구공탄 아궁이 위 가마솥에서 고고 있는 선지 해장국이 오감을 자극했다. 술과 땀과 담배에 전 몸은 해장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면 다시 팔팔해졌다. 1970년대 혈기방장한 20대는 또 대중옥에서 아침을 시작했다.
14일 저녁 대중옥에 모인 광희초등학교 52회(1960년 졸업) 동창생 10여 명은 그렇게 추억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이날은 그들 왕십리 토박이 ‘오이회’가 대중옥에서 갖는 177회째이자 마지막 월례 모임이었다. 아니 ‘왕십리’ 대중옥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현재 성동구 하왕십리 뉴타운지구에 있는 대중옥은 사실상 왕십리의 옛 흔적이 밴 마지막 가옥이나 다름없다. 청계천을 끼고 무학로, 난계로, 왕십리길로 둘러싸인 약 34만 m² 터를 채우고 있던 건물들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대중옥만 철거를 몇 년째 미룬 채 50년 훨씬 넘게 지켜온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수십 년 단골들을 위한 최후의 서비스라고나 할까. 그러나 다음 달이 되면 대중옥도 더는 버티기 어렵다. 옮겨갈 용지는 벌써 정해졌고 건물도 세웠지만 주인 이백만 씨(63)는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이 씨가 현대식 건물에 들어설 새 대중옥을 마뜩지 않아 하는 이유는 하나다. “식당은 손님 보기에 만만해야 하거든요.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별 부담 없이 문 열고 들어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사장이 운전사와 함께 해장국 먹는 옆에서 막노동 끝낸 사람이 소주 한잔 걸치면서 한 그릇 비우는 그런 식당 말이죠. 우리가 그런 곳이거든요.”
부모님이 6·25전쟁 정전 직후 집 한편에 나무로 짠 탁자 네댓 개 놓고 시작한 대중옥이다. 사대문 안에 들어가 팔 배추며 채소를 씻는 거대한 우물이 대중옥 앞에 여러 곳 있었다. 날이 새기 전부터 뚝섬 등지에서 키우던 채소를 우마차나 말 달구지에 싣고 온 사람들이 동대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아침을 이곳에서 때웠다. 1960년대에는 우물을 메운 터에 조그만 철공소(소위 마치코바)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하루 일을 끝내고 손톱 밑에 낀 기름때를 대충 찬물로 닦아낸 공원들이 호기롭게 문을 열고는 “아줌마, 소주 반병하고 해장국이요”를 외쳤다. 지금도 소주 반병을 1000원에 내놓는다.
어머니의 손맛 때문이었는지, 막걸리를 섞어 발효시킨 이른바 찰선지 덕분인지 해장국 맛은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1970, 80년대에는 부처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도 찾았고, 조선일보 방우영 당시 사장은 틈나면 회사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생전에 즐겨 찾던 가수 현인 씨는 주변 손님들이 “한 곡조만 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면 앉은 자리에서 멋쩍은 그러나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아∼ 신라의 다아알∼바암이여∼”를 열창해줬다.
14일 오후 9시. 오이회 동창생들이 대중옥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 어렸을 때 기억 나? 어머니가 냄비 안겨주시면서 ‘대중옥 가서 해장국물 받아와라’ 그러셨잖아.” “그 심부름 많이 했지.” “우리 집은 옆에 있던 ‘옥천옥’에서 설렁탕 국물 자주 사와서 먹었는데.” “예끼, 이놈아. 하하하.” “그런데 정말 오늘이 여기서는 마지막이야?” “뭘 마지막이야. 다른 데로 옮기면 거기서 또 하면 되지.” “그렇긴 한데…. 우리가 알던 왕십리는 이제 다 사라지는구나.” 방치된 아파트 터에 밤바람이 휑하니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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