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성운 언저리에서 불타 침몰하던 전함, 탄호이저 기지의 암흑 속에 번뜩이던 섬광…. 그 모든 것이 곧,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빗속에 흐르는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블레이드 러너’(1982) 중에서.
클라이맥스 대결 끝 부분. 리플리컨트(복제인간) 사냥꾼 데커드를 살려준 로이(룻거 하우어)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이다. 고장 난 TV 화면이 깜박거리듯, 스크린 속 하우어는 수명 다 된 기계처럼 서서히 ‘작동’을 멈췄다. 자신을 죽이려 질기게 쫓아온 인간의 목숨을 구해준, 안드로이드의 유언. 2007년 만들어진 파이널 컷 DVD 코멘터리에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은 “현대시 같은 대사”라며 만족스러워했다.
감독의 자화자찬일까.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에 바친 경의일까. 아니면 두 시나리오작가에 대한 새삼스런 헌사일까.
1981년 7월. 넉 달의 촬영기간 막바지까지 이 대사는 시나리오에 없었다. 감독이 현장에서 내놓은 아이디어도 아니다.
이틀 전 저녁 시작해 실내 세트를 인공비로 채우다시피 하면서 두 번의 자정을 넘긴 마지막 촬영현장. 하우어가 스코트 감독에게 다가가 면담을 청했다.
“로이의 죽음 장면에 대해 제안할 게 있어요.”
시간에 쫓겨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텐데도 감독은 잠깐 틈을 내 트레일러에서 그를 만났다. 하우어가 준비한 대사를 읽었고, 스코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 소설가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면 더 멋진 대사가 나왔을까. 아닐 거다. 그 한 줄은 자신의 여덟 번째 장편영화 출연작에 모든 것을 걸고 ‘4년 수명의 리플리컨트 로이’를 생짜로 살아낸 배우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말이었다. 예정된 소멸을 목전에 둔 공포. 그 두려움을 드러내길 거부하는 자존감. 여러 갈래로 나뉘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눈꺼풀 작은 떨림에까지 응축돼 있다. 머리로 상상해 글로 뽑아낸 표현이 아니다. 잉크가 번지듯, 몸 안에서 피부 밖으로 배어나온 문장이다.
고등학생 때. TV에서 처음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방영한 날이었다. 그럭저럭 재미나게 보던 중 누나가 문득 부모님께 이런 말을 했다.
“역시, 원작소설이 더 훌륭하네요.” 어머니가 대견한 듯 답하셨다. “그렇지?”
좌절이었다. 3시간 40분이 넘는 영화를 끝까지 봐봤자 나는 ‘더 훌륭한 것’을 모르는 신세라는 얘기. 그 뒤로 상당 기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읽은 책보다 본 영화가 더 많은 내 마음 위에 문화적 열등감을 얹어놓았다.
모차르트나 미켈란젤로가 아닌 사람에게, 오래 빛날 무언가를 빚을 순간은 일생을 통틀어 얼마만큼 허락될까. 하우어의 현주소는 ‘배트맨 비긴즈’(2005)의 볼품없는 조역이다. 그러나 그런 처지가 땅에 떨어져 빗물에 짓이겨진 꽃잎처럼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다. 30년 전 어느 새벽 그가 빚어낸 찰나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은은한 후광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개봉한 해. 발터 벤야민은 한 논문에서 “무대 위 배우는 자신을 역할과 동일시하지만 영화배우는 그렇지 못하다”고 썼다. 하우어의 대사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벤야민의 우려와 폄훼를 불식시키면서, 덤으로 소심한 내 문화적 열등감까지 툭 털어내 준, 고마운 표석이다.
krag06@gmail.com
krag 동아일보 기자. 조각가 음악가 의사를 꿈꾸다가 뜬금없이 건축을 공부한 뒤 글 쓰며 밥 벌어 살고 있다. 삶은 홀로 무자맥질. 취미는 가사노동. 음악과 영화 덕에 그래도 가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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