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문장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타자성(他者性)으로 풀어냈다. 물론 남성중심적 사고란 비판이 따르겠지만 그는 여성적인 것을 상처 입을 가능성과 이해 불가능성, 곧 타자성의 핵심으로 봤다.
여성과의 성애(에로스)는 그것을 붙잡기 위한 몸부림이다. 불가해한 타자성과 합일을 이루려는 절박한 몸짓.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타자(여자)와 나의 합일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에로스의 비극이다.
그렇다면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가. 레비나스는 여기서 놀라운 통찰을 보인다. 에로스의 결과로 태어나는 아이를 통해 타자와 나의 간극이 메워지는 기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에서 기획, 제작한 연극 ‘주인이 오셨다’(고연옥 작, 김광보 연출)는 타자성에 대한 이런 통찰을 역방향에서 보여준다. 바로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타자화된 아이의 관점에서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아이를 구원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자루(이기돈)는 철저히 이기적 욕망의 부산물이다. 그의 엄마 순이(문경희)는 한국 사창가에 팔려온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다. 사창가를 탈출한 순이는 우연히 금옥(조은경)에게 발견돼 금옥의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다 그 아들 종구(한윤춘)의 아기를 갖게 되는데 그게 자루다. 금옥과 종구는 이를 계기로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순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타적 동기와는 상관없다. 각각 식당에서 일할 노예, 자신의 성욕을 채워줄 노예로서 순이를 묶어둘 사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금옥과 종구는 자루의 엄마로서 순이를 계속 노예로 묶어두기 위해 멍에도 씌운다. 바로 말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순이를 노예로 부리기 위해선 그를 이해 불가능한 타자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쉽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면서 이해 불가능한 순이야말로 레비나스가 타자성의 핵심으로 파악한 ‘여성적인 것’의 상징이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좌절과 분노에 싸여 자란 자루는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자 비굴할 정도로 우정을 구걸한다. 하지만 독특한 외모로 인해 짐승, 괴물, 악마로 호명되면서 역시 철저히 타자로 소외된다. 결국 타인들이 자신을 호명하는 대로 악마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불행의 원천으로서 어미마저 죽일 수 있는 괴물이 되기 위해 연쇄살인마가 된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이 타자의 삶을 지배하고 생사여탈권을 쥔 주인임을 선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살인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다시 엄마를 찾아간 그는 자신과 동일시했던 엄마에게서 전혀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무너진다. 그토록 만만하게 여겼던 엄마에게서 ‘내가 아닌 불가해한 타자’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언어를 익힌 자루와 한국어를 배운 순이가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이해영역의 바깥에서 서성이는 타자에 대한 사랑만이 진실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고연옥 작가는 한국사회의 폭력의 기원에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자를 더욱 더 타자화하려는 욕망이 숨어있음을 섬뜩하게 파고든다. 고 작가와 11번째 작품을 같이 한 김광보 씨는 때론 사실적이고 때론 신화적인 그 대사를 기름기 쫙 뺀 간결하고 함축적 무대언어로 옮겼다. 배우 12명의 차진 연기도 훌륭하다. 특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선 뱀, ‘오장군의 발톱’에선 개, ‘오이디푸스’에선 새로 출연해 동물전문 배우라 불렸던 이기돈 씨의 눈망울이 차례로 갈구 슬픔 분노 증오 사랑으로 물들어갈 때의 소름끼치는 내면연기가 일품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2만∼5만 원. 5월 1일까지 서울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02-327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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