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외로움에 빠진 20대, 일탈 꿈꾸는 50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30일 03시 00분


우리가 몰랐던 한국인의 마음 지도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com
‘질투심의 화신’ 20대 여성과 ‘쿨(cool)하지만 위태로운’ 50대 아저씨.

우리나라 20대 여성의 속마음엔 봄바람은커녕 시베리아의 삭풍이 불고 있다. 그들은 자기보다 나은 타인에 대해 매우 강한 질투심을 갖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독한 집단이다. 다른 나라의 20대 여성 자살률은 동년배 남성의 절반 정도이지만 한국에서는 자살하는 여성의 수가 이미 남성을 넘어섰다.

반면 50대 남성들은 전 연령대 중 상대적으로 가장 마음 편한 인생을 살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가장 적게 신경 쓰고, 스트레스도 가장 낮다. 하지만 삶의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자극적 경험을 원하는 경향이 제일 강하다. 일탈의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이가 ‘신정아 스캔들’ 류의 자극적 경험을 원한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와 함께 30일부터 연중 기획 ‘한중일 마음 지도’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대홍기획(콘텐츠 기획)과 엠브레인(설문 실시)도 파트너로 참여했다.

한중일 마음 지도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분석하면서 중국인 및 일본인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한중일 3국에서 1000명씩, 총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첫 회에서는 우선 한국의 특징적 세대를 분석하고, 한국인의 정신적 특성과 관련한 주요 포인트들을 소개한다.
(아래 본문에서 긍정적 답변은 ‘매우 그렇다’와 ‘그렇다’의 합이다. 부정적 답변은 ‘전혀 그렇지 않다’와 ‘그렇지 않다’를 합친 것이다. 경향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는 5점이 만점이다. 1점은 ‘전혀 그렇지 않다’, 2점은 ‘그렇지 않다’, 3점은 ‘보통’, 4점은 ‘그렇다’, 5점은 ‘매우 그렇다’이다. 아래 기사에 등장하는 혜리는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가상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인물 여러 명의 발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 한국 20대 여성, 과소비-외국행으로 출구 찾아

“외국인 남자친구요? 쿨하잖아요. 한국 남자보다 자상하고, 여성을 평등한 시각에서 바라봐 주거든요. 가족 간의 관계도 평등해서 좋아요. 남자친구 부모님께서는 한국 사람처럼 집안이나 배경을 많이 보시지 않더군요. 유럽분들이라 그런지 나 자신을 더 많이 봐주시는 것 같아요. 솔직히 부모님 노후 문제나 형제자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국보다 자유로운 편이라 부담이 적어요.”

혜리는 벨기에 출신 남자친구와 열애 중이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꿋꿋이 참아내고 있다. 결혼 후 유럽에 가서 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까. 요즘엔 인터넷 카페에서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눈다. 카페 대문에는 “항상 우리 곁에는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도와주고 격려해 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란 문구가 걸려 있다.

그녀가 외국인 남자친구를 사귀게 된 것은 여성학 수업 교재로 ‘경계선 위의 여성들(Women on the Verge·카렌 켈스키·2001년)’이란 책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 책은 억압적인 기업문화와 가족 구조에 반발한 일본 여성들이 해외 유학이나 외국인과의 결혼에 나서게 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처럼 해외 연수 경험이 있는 친구들은 지금의 현실에 많이 답답해해요. 여성 입장에서 한국은 사회 환경이 열악하고 경쟁이 너무 심하니까요. 취직도 힘들잖아요.”

여성의 20대 무렵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20대 그녀들은 심리적인 압박과 갈등으로 ‘상실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특히 예전 선배들에 비해 자아가 강한 이들은 자신의 ‘주체적 삶’과 관련해 많은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그로부터의 출구를 외국행이나 과소비 등에서 찾는다.

마음 지도 조사에서 20대 여성들은 타인의 시선에 매우 민감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반 이상(52.3%)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염려한다고 답했다. 특히 취업시장에서의 성차별은 여성이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게 만든다.

“선영은 살얼음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배운다고 말한다. 가진 것도 특별히 없고, 얼굴도 그다지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선영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사회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란다.… 같은 조건이면 남자를 뽑는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학점뿐만 아니라 군대에서 남성들이 배우는 것처럼 극기 훈련부터 동아리 활동까지 모든 것을 다 했어요. 나의 여성성을 삭제하기 위해 술자리도 과감하게 가려고요.”(“누구를 위한 ‘섹시한’ 미래인가” 중·변혜정 서강대 상담교수)

혜리는 때로 답답한 마음을 충동구매로 푼다. 마음 지도 조사 결과 20대 여성의 충동구매 지수는 3.55점으로 동년배 남성(2.92점)을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스트레스가 높다는 점에서 20대 여성의 충동구매는 ‘강박구매’에 가깝다. 스트레스 정도는 전 연령대 중 20대여성(55.4% 긍정)이 가장 높다. 강박구매를 하는 소비자들은 불쾌한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구 때문에 물건을 산다.   
“마음이 공허할 때 명품을 사면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져요. 물론 한 번에 많은 돈을 쓴 것 때문에 후회도 하지만요. 하지만 가끔 명품을 사고, 해외여행을 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아요.”

한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 자살률(10만 명당 13.2명)은 OECD 평균(5.2명)의 2배를 훨씬 넘어선다. 특히 20대 여성 자살률(25.4명·이하 2009년 기준 통계청 자료)은 2008년에 이어 남성의 그것(25.3명)을 넘어섰다. 대부분의 OECD 회원국 20대 여성 자살률은 남성의 절반 이하다.

○ 체념에 익숙해 ‘안정적’이 된 한국 50대 남성


공자는 50세를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하늘의 뜻을 알아 순응’하는 나이라는 뜻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번 조사에서 한국의 50대 남성은 다른 나이대에 비해 ‘타인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2.68점) ‘시기 질투도 대체로 낮고’(2.91점) ‘불평이 적으며’(2.84점) ‘스트레스도 가장 낮은’(3.06점)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일을 쉰 지 3년 되는 김정욱 씨(55)와 현직에서 일하는 백홍열 씨(53)는 담담하게 “포기하는 거죠”라고 입을 모았다. 김 씨는 “이제 다른 기회는 없다는 현재 한국 사회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아버렸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쿨하지만 이면에는 체념이 도사리고 있다.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로 평생고용이 무너지고 자신보다 겨우 몇 년 선배들이 회사를 떠나는 걸 봤다. 명예퇴직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이 되는 걸 몸으로 겪었다. 김 씨는 말한다. “그때는 구조조정 되는 직원들은 ‘눈물의 비디오’라도 만들었어요. 일종의 격렬한 저항이었죠. 지금은 저항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압니다.” 백 씨는 “우리는 조직에서 튕겨져 자영업을 하거나, 아니면 곧 일을 정리하게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세대”라고 했다.

50대는 미래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지도, 추구하는 가치가 크지도 않다. 더 성장하거나,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대부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 “라면을 매일 먹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며 자랐고 연공서열이 확고할 때 일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얼마를 받을지 명확했고 미래도 불투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체계는 거의 다 깨졌다. 문제는 이들이 성과지상의 새 체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것. 백 씨는 “아마 지금 50대는 대부분 ‘나는 중산층’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김 씨는 “요새는 차라리 ‘1970, 80년대 우리나라의 현실이 고마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앞만 보고 살면 됐기 때문이다. 열심히만 하면 기회가 보장되던 때”라고 했다. 체념에 익숙하다 보니 시기, 질투, 불평이 필요 없다. 아니, 소용없다는 걸 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자조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안정돼 보이는 50대 남성이 왜 다른 누구보다 ‘자극적 경험을 강하게 찾는 것’(63.2% 긍정)일까.

하나는 ‘인생 뭐 있어?’라는 생각이다. 과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명확해진 상황에서 남은 길은 자아실현뿐이다. 자아실현 방법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다. ‘더 나이 들기 전에…’라는 생각이 더해지면 ‘애인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댈 때도 있다. 이야기가 통하는 30대 여성과의 연애를 꿈꾸며 실현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뒤늦은’ 로맨스는 여성에게 뭔가 줄 수 있는 남성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김 씨는 잘라 말한다. 김정운 명지대 사회교육원 여가경영학과 교수는 50대 남성의 로맨스 추구에 대해 “젊은 시절 암울한 시대 상황 때문에 낭만적인 경험을 해보지 못한 ‘박탈당한 청춘’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설명했다.

극한 쾌감을 맛보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지역의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전시회를 순례하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성장한 아이들에게서 멀어지고 배우자와도 소원해져 30, 40대에 비해 더 외로움을 느끼는 50대는 그저 일상을 탈출하고픈 욕구가 커진다.

원만한 삶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내심 자극적인 것을 찾으며 자아실현에 애쓰는 이들 50대 남성은 공격성(38.9%) 및 이와 비슷한 남성성(50.5%)도 평균 한국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백 씨는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외환위기 같은 시대상황의 산물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격변을 겪으며 사회 흐름에서 도태되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방어의 심리가 공격성으로 잠재해 있다는 풀이다. 김 교수도 “50대 남성의 역사적 경험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창 사회활동을 하던 1970, 80년대의 압축성장과 군부독재의 경험이 이런 성향을 이들의 심리에 집단정서로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어쩌면 50대 남성은 두려울지 모른다. 백 씨는 “인생에서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50대임을 쉽게 인정하기도 싫다. 조사에 응답한 50대 남성들은 대부분 자신이 아직도 40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 연령대 중에서 실제(호적상) 나이와 본인이 생각하는 외관상 나이의 차이는 50대에서 가장 컸다. 한국의 50대 남성들은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이나 어려 보인다고 답변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한중일 3000명 어떻게 조사했나

‘한중일 마음 지도’ 프로젝트 설문조사는 한국, 중국, 일본인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국가별 1000명).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온라인 조사 전문회사 엠브레인의 패널이다. 이들 패널은 각국의 성별, 연령별, 소득별 인구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전국의 20∼50대를 대상으로, 중국에서는 1, 2급 도시에 사는 20∼40대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중국의 경우 지역적 경제 수준의 편차가 심하므로 한국 및 일본과 직접적 비교가 가능한 2급 도시까지를 대상으로 삼았다. 또 인터넷 조사라는 특성 때문에 중국에서는 50대가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그러나 50대가 빠져도 국민 전체의 경향성은 비슷하게 나오기 때문에 조사결과의 유의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번 조사의 신뢰수준은 95%이며, 오차 범위는 ±4.27%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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