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홍수환스타복싱체육관. 스파링 중인 선수들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건네는 여성이 눈에 띄었다. 체육관에 오는 문의 전화까지 능숙하게 받는 모습은 코치라 해도 믿을 법했다. 바로 이유리 씨. 그는 기자를 보자 대뜸 “복싱 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 “한번 해보면 시영이 언니가 왜 복싱에 죽고 못 사는지 알게 될 걸요.”
유리 씨는 2008년 초여름 체육관을 처음 찾았다. 1년 반가량 호주 유학을 하면서 20kg 넘게 늘어난 몸무게를 빼기 위해서였다. 처음 일주일은 지옥 같았다. “87kg까지 나가던 몸무게를 발목이 지탱하지 못했죠. 잠도 설칠 만큼 아팠어요.”
그래도 꾹 참고 버텼다. “샌드백을 칠 때 느껴지는 주먹의 울림은 한번 맛보면 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버텼더니 반년도 지나지 않아 18kg이 빠졌다. “복싱만큼 정직한 운동이 없죠. 고생한 만큼 체력이 올라가고, 실력도 느니까.”
그렇게 복싱에 빠져 있던 그가 이시영을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7월. 드라마 단막극에서 복서 역할을 맡게 된 이시영이 대본을 들고 체육관을 찾아 왔다.
“처음엔 ‘복싱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닌가’란 생각을 했어요. 복싱은 몇 주 한다고 폼이 나오질 않거든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시영 언니가 체육관에서 쓰러질 때까지 훈련하는 것도 모자라 배운 내용을 집에서 완성해 오더군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언니와의 첫 스파링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스파링 전에 언니가 ‘어떤 느낌이냐’고 묻더군요. ‘학교 다닐 때 싸워 본 적 있냐, 바로 그런 느낌’이라고 했더니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어요. 그런데 딱 링에 오르니까 ‘이거 장난 아니겠다’ 싶었죠. 언니가 눈빛으로 ‘오늘 내가 널 잡아먹겠다’는 얘길 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복싱 3년차인 유리 씨에게 초보 이시영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투지는 대단했어요. 신체 조건이 좋은 데다 힘도 좋았죠. 언니한테 한대만 맞았는데 다리가 휘청거렸으니까.”
당시 유리 씨는 현장을 찾은 드라마 PD로부터 이시영의 라이벌 역할에 즉석 캐스팅됐다. 하지만 3개월가량 땀을 흘리던 중 복싱 드라마 기획이 취소됐다는 통보가 왔다. 그는 “당시엔 정말 아쉬웠다”면서 “그래도 돌이켜보면 복싱에 대한 애정도 늘고 얻은 것도 많아서 괜찮다”며 웃었다.
유리 씨가 다니는 체육관은 지금 ‘이시영 특수’를 누린다. 이시영이 다닌 체육관이란 입소문을 타면서 특히 여성 관원이 늘었다. 그는 “당연히 좋다. 시영 언니한테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싱긋 웃더니 덧붙인 한마디. “딱 하나 아쉬운 게 있긴 하죠. 원래는 제가 우리 체육관의 홍일점이었거든요. 근데 요즘엔 관장님이 ‘우리 시영이’라고만 하니 조금 서운하긴 해요.”
○ 전국대회서 진 결승상대 성소미 양, 팔은 가늘지만… 펀치는 묵직했어요
지난달 17일 안동실내체육관. 전국 여자신인아마추어 복싱선수권대회 48kg급 결승전이 열렸다. 푸른색 헤드기어를 쓴 선수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회심의 펀치는 팔이 긴 상대에게 닿지도 않았다. 무리하게 접근하다 오히려 묵직한 펀치를 속수무책으로 허용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스텝도 무뎌졌다.
상대방을 향한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 역시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3라운드 1분 40초 만에 RSC패(아마추어 경기에선 점수 차가 15점 이상 벌어지면 심판이 RSC를 선언). 상대방이 기뻐서 펄쩍펄쩍 뛸 때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흘렀다. 경기에 진 것보다 실력의 절반도 발휘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복싱 유망주 성소미 양(경남체고) 이야기다. 이 대회는 복싱 경력이 1년 조금 넘는 성 양이 출전한 첫 공식대회였다. 결승전 상대는 다름 아닌 이시영. 성 양은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시영 씨의 팔이 정말 길었다. 팔이 가늘어 위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묵직하기까지 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성 양이 밝힌 복서 이시영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눈. “보통 아마추어들은 펀치가 날아오면 눈을 감거나 피하거든요. 근데 이시영 씨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데요. 그래서 정타를 날리기 힘들었어요.” 스텝에 대해서도 후한 평가를 했다. 물 흐르듯 유연하고 세련된 스텝이 인상적이었다는 설명.
사실 그도 이 경기를 앞두고 꽤 많은 준비를 했다. 이시영의 경기 동영상을 찾아보며 대응 방법을 연구했다. 왼손잡이인 이시영에 맞춰 하루 전까지 아버지와 삼촌을 불러 잠도 줄여 가며 스파링을 했다(성 양의 집안은 복싱 가문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복싱 전 국가대표인 성광배 관장, 오빠는 차세대 복싱 유망주인 성동현 씨). 하지만 결국 머릿속에 떠올린 경기를 해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생각보다 강한 상대에 당황했고, 관중들의 일방적 응원이 부담이 된 탓이다.
본업이 연기자인 선수에게 전업 선수가 졌는데 억울하진 않을까.
“제가 못해서 실망했죠.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사실 그날 밤엔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잠도 못 잤어요. 그래도 며칠 지나니 보약 먹은 기분이 들던데요. 더 잘해야겠단 생각도 들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너무 정신없어서 ‘축하한다’ 말 한마디 못해드린 게 아쉬워요.”
경기엔 패했지만, 인기 탤런트와의 한판 승부 덕분에 성 양은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반 친구들이 몰려와 그에게 사인을 부탁했을 정도. 그의 담임선생님은 “소미는 워낙 착하고 성실한 아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것”이라며 웃었다.
복서 성소미의 눈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그는 “일단 다시 한번 이시영 씨와 붙고 싶다”고 했다. “첫 만남에선 많이 배웠지만 이번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 그는 “아이들에게 준 사인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챔피언 벨트를 찰 것”이라며 웃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