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환구단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30일 03시 00분


‘순천자존’ 천명이 들리는 듯

서울광장에서 두 번 길을 건너 낮은 언덕의 계단을 오르면 건물들 사이에서 황궁우(皇穹宇)가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황궁우는 고종 황제가 천신과 지신, 인신(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안치한 3층 8각 건물.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지만 황궁우 주변은 늘 인적 드문 산사(山寺)처럼 한적함이 흐른다. 황궁우는 대한제국이 제천의식을 위해 설치한 환구단의 일부다.

조선 말, 고종은 몰락해가는 나라의 왕에서 단숨에 황제가 됐다. 조선이란 국호를 접고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제국’으로 새 출발 하며 꺼져가는 국운의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이 됨으로써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노리던 일본이나 러시아란 태풍 앞에서는 그저 가녀린 촛불의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황제 즉위식은 남별궁 터, 즉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서 열렸다. 즉위식과 제천의식을 위해 조정은 1897년(고종 34년) 환구단(제천단·祭天壇)을 쌓았다. 그 뒤인 1899년 화강암 기단 위에 황궁우를 축조해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했다.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石鼓)를 황궁우 옆에 세웠다.(출처: 두산백과)

예로부터 중국 황제는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로 불렸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천자의 일이었으며 황제가 아닌 제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식은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조선 초기부터 억제되기 시작했다가 드디어 세조(1455∼1468년 재위) 때 폐지됐다. 제천의식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부활했다.

하지만 조선의 황제가 천명을 받는 이곳이 일제강점기에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일본은 1913년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광복 후 철도호텔이 없어지면서 환구단이 복원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있었지만, 그 터는 이내 대기업에 불하됐다. 황궁우는 호텔의 부속품처럼 홀로 남았다. 호텔 후원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애처로운 형국이다.

환구단 모퉁이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사람의 발길은 없지만, 가까이에 있는 인공폭포의 물소리 때문에 조용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스케치 속의 황궁우는 언제나 고요해 보이니 다행이다. 문득 남의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외국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마치 한국 전통 풍경 액자를 보듯 나를 바라본다. 한복 입고 붓을 들고 수묵화라도 그려야 할 것 같은 이 어색함이라니.

그림을 접고 황궁우에서 어떤 천명을 내려주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처마 밑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깊어 가는데 아무도 찾는 이의 발길이 없다. 그때 문득 어디선가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자, 이제 개방종료시간입니다. 나가주세요.”

이젠 나가 달라는 공익요원의 말이 ‘천명’인가 싶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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