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의 ‘수화소노인가부좌상’. 1947년 부처님오신날 직후 수향산 방을 찾아 김환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서울 성북동에는 노시산방(老枾山房) 터가 있다.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30, 40년대 미술인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1904∼1967)과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1913∼1974)가 시간차를 두고 살면서 창작과 교유를 했던 곳. 건물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지만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소중한 흔적이다.
두 사람 인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전시가 노시산방 터 근처에서 열리고 있다. 성북구립미술관이 6월 26일까지 마련한 ‘두 예술가를 만나다’. 근원과 수화 두 사람의 회화 작품을 비롯해 표지 장정과 삽화 인쇄물, 문학 작품, 성북동 시절의 에피소드가 담긴 사료 및 영상 자료 등 100여 점을 선보인다. 김용준이 김환기를 그린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끈다.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인 두 사람의 인연은 각별하다. 둘 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서로 교유하면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평생 몰두한 미술인이다. 아홉 살 위인 김용준은 동양화가 서양화가이자 미술사학자 문인으로,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예인이었다.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국적 소재와 미감을 세련된 조형미로 구현해낸 작가였다.
성북동의 노시산방은 두 사람의 미술인생에 있어 결정적 전기를 마련해준 장소다. 김용준은 1934년 노시산방으로 옮겨온 이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진로를 바꿨다. 이어 1944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한국 미의식에 대해 연구하고 이에 관한 글을 썼다.
추상미술 개척 김환기
후배 김환기는 1944년 김용준에게서 산방을 넘겨받았다. 그는 산방 이름을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바꿨다. 자신의 호 수화의 ‘수’자와 부인 이름 김향안의 ‘향’자를 합한 것이다. 김환기는 1956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항아리, 새, 산, 달 등 한국적 소재에 대한 미적 탐색을 심화시켜 나갔다. 경기 의정부로 이사한 김용준은 수시로 수향산방을 찾아 김환기와 미술을 논하곤 했다.
김용준이 김환기를 그린 그림들은 두 사람의 산방에서의 인연을 특히 생생하게 보여준다. ‘수화소노인(樹話少老人)가부좌상’은 김용준이 1947년 수향산방을 찾아가 김환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김환기의 마른 체구와 선한 얼굴이 인상적이다.
문사철 겸비 김용준
김용준의 ‘수향산방 전경’(1944년)도 흥미롭다. 산방의 마당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환기 부부의 모습을 그렸다. 키가 큰 김환기와 키가 작은 부인을 대비적으로 표현한 모습이 익살스럽다. 김환기가 좋아 의정부에서 성북동 산방까지 기꺼이 찾아온 김용준의 마음, 기꺼이 김용준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김환기의 내면이 담백하게 전해온다.
그러나 이 같은 인연의 산방은 현재 사라진 상태다. 성북구립미술관의 김경민 큐레이터는 “장기적으로 노시산방을 복원해 한국 근현대 미술의 상징공간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930년대 말∼1940년대 초의 서울 성북동 ‘노시산방’.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김용준이다.
미술관의 전시공간, 전시구성 모두 두 사람의 인연만큼이나 깨끗하다. 주변 성북동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미술관이 마련한 인근 성북동 문화답사 프로그램도 있다. 6월 25일까지 매주 수, 토요일 오전 10시에 출발한다. 노시산방 터, 장승업 집터, 최순우 옛집, 조지훈 집터, 이태준 고택, 간송미술관, 심우장, 선잠단지, 서울성곽 등을 둘러본다. 070-8644-8371, 8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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