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의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은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가지 않겠습니다.” 도쿄의 총련계 대학인 조선대학에서 입학시켜주겠다며 입학원서까지 보내왔지만 그는 단호했다. 일본 교토(京都)의 가난한 재일동포 집 5남매 중 막내에게 대학 진학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저절로 열린 대학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조선대에는 야구부가 없다는 것. 1959년 9월의 일이었다. 두 달 뒤 부산 동아대에서 초청장이 왔다. 그해 8월 재일동포고교야구단 일원으로 태어난 후 처음 한국에 와서 투수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그를 동아대가 눈여겨본 것이다. 한국의 불안한 정국과 빈곤한 생활을 염려한 어머니와 큰형의 반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듬해 한국으로 떠났다. 이유는 역시 단 하나. 야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야구였다. 》 ○ 野人… 야구인
“그때 조선대학에 야구부가 있었다면 당연히 갔겠지. 그럼 내 인생은 바뀌었을 거요. 북송선 타고 북한에 갔으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갈림길도 있었어요.”
김성근 SK와이번스 감독(69)은 52년 전을 그렇게 회상했다. 김 감독에게 야구는 ‘사는 목적이고 이유’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거나 변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고 즐기는 게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런 직업을 택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어려운 일을 아주 어렸을 적 해냈다. 중학생 무렵 자신이 얼마나 야구를 좋아하는지 알아버린 것이다. “그냥 좋아한 거요. 스모도 잘하긴 했지만 다른 길은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그는 다다미 12장 깔린 방 두 칸이 전부인 판잣집에서 살았다. 두 방 합쳐 19m²(약 6평)인 공간에서 일곱 식구가 북적댔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살림살이여서 부모님과 형, 누나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구도 어린 성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뭘 하든 상관없던 거요.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내 맘대로 살았어요.”
딱지치기, 팽이치기, 고기잡기 같은 놀이도 했지만 어린 그를 사로잡은 건 동네 아이들과 제재소 앞 공터에서 한 야구였다. 말이 야구지 서너 명이 한편을 먹고 하는 야구놀음이었다. 글러브는 당연히 없었다. 한 팀 9명을 갖춰서 경기를 해볼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야구는 점점 재미있어졌고 그는 야구를 너무나 좋아하게 됐다. 야구에 푹 빠졌고 야구 속에서 길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다.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물론 사립학교에 보낼 돈이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생계를 책임졌던 큰형은 그에게 “공부하고 싶으면 (네가) 돈 벌어서 갈 수 있게 제일 학비 싼 학교에 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공립 가쓰라(桂川)고교에 갔다. 공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에도 야구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력도 출중하지 못한 소년이 야구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좀 의아하지 않은가.
“그게 우리와 일본이 다른 점이오. 우리는 야구를 할 때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갖고 시작하지. 그러나 일본은 아니야. 좋아서 하는 거요. 내가 야구를 잘 못한다는 걸 알았다고. 그런데 좋아하거든. 소질이 없으니까 노력했지. 노력은 엄연히 해야 하는 거요.” ○ 野人… 아웃사이더
한국에 온 이후 지금까지 김성근 감독은 항상 한국야구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기업은행 야구팀에서 뛸 때는 한국 최고의 왼손 에이스였다. 국가대표를 지냈고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국가대표 코치진에 매번 이름을 올렸다. 고등학교 야구가 최고 인기였던 1970년대에는 서울의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으로 전국 제패의 성가를 올렸다. 그가 1976년 충암고 감독으로 갈 때 계약금으로 현금 600만 원(당시 주택 세채 값)을 받은 사실은 신문에 크게 났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로는 6개 구단의 감독을 지냈다. 그리고 2007년부터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팀을 진출시켜 세번을 우승했다.
그런데도 ‘김성근’ 하면 비주류라는 말이 떠오른다. 왠지 주류에는 끼지 못하는(혹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반(半)쪽발이’라며 그를 무시하고 냉대했던 시선은 이제 거의 사라졌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로 비친다.
그 이유의 일단은 김 감독이 한국에서 영원히 살기로 결정한 1964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수교하지 않은 때라 한국에서 일하는 재일동포들은 1년에 40일가량은 일본으로 돌아가 체류해야만 일본 영주권이 유지됐다. 기업은행에서 한해 20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는 성가신 일이었다. 결국 일본 영주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완강히 반대한 어머니를 뒤로하고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탄 22세 청년 김성근은 대한해협을 건너며 펑펑 울고 만다. 혼자 남았다는 짙은 외로움이 엄습한 것이었다.
“그때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게 ‘내가 여기(한국)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였어요. 어디 기댈 데도 없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발동한 거요. 나 혼자,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뜻대로 살아간 게 여기까지 왔나 싶어요.”
그의 인생을 바꾼 게 야구였다면 그가 지금의 자리까지 오도록 바꾼 순간은 이때였다고 김 감독은 말한다. 영주귀국이라는 고립무원의 상황이 그를 ‘내 인생에서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맞추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도록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맞춰 사는 것은 인생이 아니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가 없어지는 거요. 다른 사람한테 맞추면 아픔이나 고난은 없을지 몰라도 내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왜 그렇게 했나 하는 후회와 그 사람에 대한 증오밖에 없어요.”
6개 구단의 감독을 했지만 한번도 “감독 시켜주십시오”라고 부탁해 본 적이 없다. 이용할 연줄도 없었다. 오직 실력이었다. 구단 윗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 기분 맞추러 온 사람 아니다. 착각하지 말아 달라”고 당당히 말했다. 당연히 충돌이 생겼다.
“그러니 어느 구단에 가나 윗사람한테 잘리고 말지. 허허허.”
○ 야구…김성근의 멘터
김 감독은 오직 야구만 팠다. 1남 2녀인 자녀 입학식 졸업식에도 가보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내가 과거 인터뷰에서 “야구라면 지긋지긋하다”고 했을까. 당연히 친구도 별로 없다. 그의 멘터? 역시 야구다.
“나를 이끌어 준 것은 야구 아닌가. 인생상담이라는 거 해본 적 없어요. 전부 나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결했지.”
그러나 그가 단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했다면 감독직을 중도 사퇴 당하고 맞은 그의 회갑연(2002년)에 그렇게 많은 선수와 후배가 참석했을 리 없을 것이다. 힘겨울 때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얘네들(선수들) 어떻게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를 야구의 신, ‘야신(野神)’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야구를 잘 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의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신이라면 그 이상의 성장과 도전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는 야구라는 도전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
그에게 물었다. “야구를 제외하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남습니까.” 그가 잠시 생각하다 옆에 앉은 류선규 SK야구단 홍보팀장을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류선규 생각?” 사실상 야구 말고는 생각하는 게 없다는 뜻이었다. 물어본 기자가 바보였다.
P.S. SK가 4일 한화와의 경기를 이기면서 김성근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통산 1200승을 올린 두 번째 감독이 됐다. 그는 담담했다. 당연했다. 1200승을 달성하기 전 이미 그의 목표는 1600승이었다. 욕심쟁이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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