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오이바 토이카(핀란드)의 유리 작품 ‘루비 버드’(Ruby Bird). ②피오르드의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본떠 만든 알바르 알토(핀란드)의 유리 화병. ③알바르 알토의 의자. 그는 디자인과 건축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④에드바드 린달(스웨덴)의 올빼미 오브제(도자기). ⑤엘리자베스 헨릭손(스웨덴)의 유리 화병 ‘오거니즘’(organism). http://imagebank.sweden.se, 사진 촬영 및 저작권자 사라 다니엘손. ⑥스티그 린드베리(스웨덴)가 디자인한 TV ‘루마비전’(Lumavision)
요즘 어디를 가든 디자인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북유럽 디자인이 화두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한 북유럽 디자인 브랜드들은 어느새 두꺼운 마니아층까지 거느릴 정도다. 심지어 내가 스웨덴에서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브랜드의 제품들까지도 최근의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한 번쯤 궁금증을 가져볼 만도 하다. 왜 우리는 문화적, 지리적으로 절대 가깝다고 할 수 없는 북유럽의 디자인에 이렇게 열광하는 걸까.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북유럽 디자인이 왜 좋으세요?”라고 묻곤 한다.
이 질문에 단순히 북유럽 디자인 제품들이 가지고 있는, 불필요한 장식을 과감하게 제거한 미니멀(minimal)한 외양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그건 절반만 맞힌 게 아닌가 싶다.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 만인을 편하게 하는 공리주의 디자인
북유럽 디자인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 출발점이 다르다. 그들의 출발점은 눈으로 보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편리하게 쓸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북유럽 특유의 민주주의 정신과 전통에까지 그 뿌리가 닿는다.
1930년대 북유럽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이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학식이 높은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누구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디자인을 통한 공리주의(功利主義)라고나 할까. 디자인을 통해 보편적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강한 믿음이었다. 스웨덴 근대 디자인 형성기의 가장 위대한 디자인 이론가로 손꼽히는 그레고르 파울손(1890∼1977)은 “디자인을 통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디자인의 역할과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디자인의 공리주의’를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는 표준화 작업이었다. 디자인을 표준화하면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대량생산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좀 더 싼 가격에 훌륭한 제품을 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북유럽의 디자인은 이렇게 태어났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때 스웨덴 친구의 부모님 댁에 초대 받아 간 적이 있다. 작은 도시에서 평범한 중산층으로 검소하게 살아온 분들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나는 핀란드의 대표 디자이너였던 알바르 알토(1898∼1976)가 50여 년 전에 디자인한 자작나무 의자와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스티그 린드베리(1916∼1982)의 식기들을 발견했다. 세계 어느 나라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세계적 대가들이 디자인한 식기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북유럽의 앞선 디자인을 집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내버스의 손잡이에서부터 공원 벤치, 우체통, 시청 건물의 조명이나 화장실 문손잡이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적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정말 많다. 북유럽의 공공디자인은 사회적 약자들의 혜택까지 배려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으로 이어졌다. 스웨덴에서는 이미 1960년대에 장애인과 노약자, 어린이, 심지어 왼손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평등하게 디자인의 가치와 혜택을 경험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작됐다. 손목이 약한 사람을 위한 빵 절단용 칼이나 류머티즘 환자를 위한 식기 세트같이 듣기만 해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수많은 디자인 제품이 북유럽에서 탄생했다.
○ 자연에서 나온 미니멀리즘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 사람들의 세련된 감각이 그들 디자인 철학의 모태가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국가는 유럽의 변방이라는 지리적인 한계 때문에 인근 국가들보다 경제, 문화적으로 낙후된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대신 자연을 닮은 소박한 마음을 디자인에 투영했다.
북유럽 사람들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성인이 된 후에도, 그리고 늙어 죽는 순간까지도 자연과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북유럽 디자인을 대표하는 수많은 거장들은 자연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찾았다.
북유럽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생활을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수시로 숲의 이끼를 보며, 강가의 조약돌을 보면서, 혹은 숲 속의 울창한 나무를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왜냐고 묻는 나에게 한 스웨덴 친구는 “그것이 가장 편하고 친숙하게 생각하는 방법”이라고 답했다. 북유럽 디자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이런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어디에 살든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으니까.
북유럽의 가구 장인들은 좀처럼 완성된 제품에 컬러를 입히거나 가공을 하지 않는다. 대부분 자연 상태, 즉 재료인 나무 고유의 컬러와 질감을 그대로 살린다. 이런 원칙 덕분에 자연과 가까운,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고 우아한 특유의 느낌이 살아난다.
특유의 자연환경이 디자인에 반영되기도 한다. 길고 어두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북유럽에선 자연히 조명에 관심이 크다. 덴마크의 루이스풀센 같은 세계적인 디자인 조명들이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유리 제품으로 유명한 핀란드 ‘이탈라’는 눈이나 얼음을 모티브로 해 형상화한 유리 제품을 많이 내놓는다.
○ 견고함과 기능성
북유럽 제품은 견고하다. 만든 지 수십 년이 지나도 고장 나는 경우가 드물다.
필자는 재작년에 덴마크 빈티지 가구 몇 점을 구입했다. 대부분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약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미니멀한 디자인은 너무나도 현대적이며, 접착제를 쓰지 않고 짜맞춘 몸체에는 뒤틀리거나 떨어져나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10여 년 전에 구입한 요즘 제품보다 단단할 정도. 대단히 유명한 가구제작자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그 이유는 물건을 제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다른 지역 사람들은 북유럽인에 대해 ‘전등 하나 갈아 끼울 때도 미팅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데만 하루가 걸린다’고 농담을 한다. 그만큼 북유럽인은 과정과 원칙에 충실하다. 이런 점들이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이야말로 완벽하고 견고한 제품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내가 만났던 북유럽 사람들은 대충 넘어가는 것이 없고, 언제나 원칙과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맞게 작업을 했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제품이 아니라 오래 사용해도 튼튼하고 내구성이 강한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견고함과 함께 실용성의 한 축을 이루는 기능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보기에만 좋은 제품이 아니라, 기능이 뛰어나고 쓰기도 좋은 제품을 선호한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냄비를 디자인하고 생산할 때도 소비자가 손잡이를 잡았을 때 어떻게 하면 편하게 쥘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핀란드에 ‘피스카르스’란 회사가 있다. 현재에는 ‘이탈라’와 ‘아라비아’를 비롯한 세계적인 브랜드를 거느리는 대기업이 되었지만 1822년부터 산업용 톱이나 각종 공구,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위를 만들어 왔다. 이 회사가 만든 가정용 가위는 현지의 문구점에서 1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에 팔린다. 하지만 피스카르스의 가위를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그 매력에 빠지고 만다. 손가락을 손잡이에 넣어 감아쥐었을 때의 편안함은 물론이고 아무리 두꺼운 종이를 잘라도 손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요즘 북유럽 디자인이 유행하면서, 그 정신이 아닌 겉모습만 베끼는 모습도 가끔 보여 마음이 불편해지곤 한다. 짜맞춤이 아니라 타카(작업용 스테이플)로 조립한 가구, 원목 대신 합성목으로 대충 마감한 소품이 간혹 눈에 띈다. 무엇보다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했던 북유럽의 디자이너들, 이들이 강조했던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우리 디자이너들도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지훈 디자인 마케터 helsinki@plus-ex.com
■ 안지훈 ■ 9년 동안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경험 마케팅과 디자인(brand experience marketing & design) 전문회사인 Plus X에서 책임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블로그 ‘스칸디나비안 빈티지 팩토리’(www.scandinavianvintage.co.kr)를 통해 북유럽에서 만났던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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