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明朗)’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 ‘유쾌하고 활발함’ 두 가지다.
최근까지는 두 번째 의미로 주로 사용됐다. 그러나 1930년대 이전의 문헌을 보면 한국에서 ‘명랑’이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치는 와중에 두 번째 의미가 부각됐다는 해석이 제시됐다. 소래섭 울산대 국문학부 교수는 “한자어인 ‘명랑’이 중국에선 날씨, 성격, 상태를 가리키는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됐지만 이를 받아들인 한국에선 1930년대 이전까지 주로 날씨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그러다 조선총독부 통치정책의 영향으로 상태나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로 쓰임새가 확장됐다”고 설명했다. 소 교수는 이런 연구 결과를 담은 책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웅진지식하우스)를 최근 펴냈다.
소 교수가 ‘명랑’에 주목한 것은 4년 전. 1930년대 작가인 박태원 김기림의 작품에서 ‘명랑’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를 탐색해 문화사적 맥락에서 ‘명랑’의 의미 변화를 추적했다.
소 교수는 일제가 1930년대 들어 조선에선 쓰지 않던 ‘명랑’이란 단어의 또 다른 용례를 의도적으로 앞세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먼저 총독부가 벌인 ‘대경성 명랑화 프로젝트’를 예로 들었다. 1930년대 총독부가 조선인을 순치하기 위해 경성의 곳곳에 ‘명랑’이란 감정을 이식하는 데 주력했던 작업이다.
1938년 부임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명랑 정치’를 표방했다. 그는 ‘반도 청년 지도에 관해서 언행일치의 명랑한 인격을 양성할 것’이라는 지시를 직접 내리기도 했다. 소 교수는 “명랑 정치란 명랑한 인격을 양성하는 것, 곧 조선인의 ‘두뇌 명랑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두뇌 명랑화’란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설명이다.
일제에 의해 ‘명랑’이 그동안 쓰지 않던 용례로 사용되기 시작한 데 이어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은 두 번째 의미를 더욱 강화했다. 소 교수는 “‘감정노동’의 등장이 총독부의 작업과 맞물리면서 명랑이라는 말의 새 용례가 더욱 확산됐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직업여성들이 ‘걸(girl)’이라는 이름 아래 등장한 사례를 들었다. 주유를 돕는 ‘가솔린걸’, 당구장에서 일하는 ‘빌리어드걸’ 등이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고객에게 우호적인 감정만 표현해야 하는 노동자들로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에 따르면 ‘감정노동자’들이다.
소 교수는 “1930년대 ‘걸’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감정이 ‘명랑’이었다”고 설명했다. 1939년 한 신문 기사에는 “현대 가두에 나선 직업여성이 제일 먼저 가져야 하는 재산이 바로 명랑 그것인데”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소 교수는 “일제의 영향으로 ‘명랑’의 용례는 확장되기 시작했고 근대화를 거치면서, 또 매스컴의 영향으로 ‘명랑’의 의미는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감정 쪽으로 자리 잡게 됐다”고 말했다.
소 교수는 현대 들어 총독부의 ‘명랑화’와 비슷한 흔적이 눈에 띄는 사례도 소개했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가 추구했던 ‘명랑한 사회 건설’,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1년 전남에서 추진한 ‘범도민 생활 명랑화 운동’ 등이다. 소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의 ‘명랑’은 정권에 저항하는 ‘불순분자’가 없는 상태를 뜻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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