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길 다란 능선들의 저 육중한 몸뚱이 하늘아래 퍼질러 누워 그저 햇살이나 쪼이고 바람과 노니는 듯 빈둥빈둥 게으름이나 피우는 듯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틈에 너의 온 몸 연둣빛 생명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 너의 찬란한 목숨
-정연복의 ‘도봉산’ 전문
도봉(道峯)은 ‘봉우리길’이다. ‘길 道(도)’+‘봉우리 峯(봉)’의 합성어이다. ‘바위로 된 하늘길’이 도봉산인 것이다. 울퉁불퉁 거친 칼금이 산과 하늘을 가른다. 칼금 위쪽은 푸른 하늘이다. 그 아래는 젖빛 화강암이다. 하늘 조각공원 같다. 늘 푸른 소나무가 근육질의 바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다. 푸른 다복솔이 희뿌연 바위에 점점이 웅크리고 있다.
도봉산은 서울 북동쪽에 우뚝우뚝 솟은 산이다. 한반도 등뼈인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의 줄기다.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100여 리(40여 km)의 꿈틀꿈틀 용틀임바윗길이다. 북한산을 바로 앞두고 말갈기처럼 삐죽삐죽 뻗쳐 있다. 영락없는 ‘무스 바른 머리카락’이다. ‘산새도 날아와/우짖지 않고/구름도 떠가곤/오지 않는다.//인적 끊긴 곳/홀로 앉은/가을산의 어스름/호오이호오이 소리 높여/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울림은 헛되이 먼 골골을 되돌아올 뿐’
-박두진의 ‘도봉’에서
불수사도북의 산줄기는 북방의 매서운 칼바람을 막아준다. 만주벌판 오랑캐들로부터도 철벽방패가 된다. 그 더운 핏줄기는 도봉산 자운봉(739.5m) 만장봉(718m) 선인봉(708m)에서 크르렁 크게 한 번 출렁인다. 그러다가 곧장 달려가 북한산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99.5m)의 삼각뿔로 용솟음친다. 옛사람들이 왜 북한산을 삼각산이라고 불렀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봉산이 용 뒷덜미목등뼈인 경추(頸椎)라면, 북한산은 용머리의 삼각왕관이다. 왕관은 삼각뿔 아래에 노적봉(716m) 문수봉(715.7m) 보현봉(700m) 영봉(604m) 비봉(560m) 형제봉(462m) 등으로 병풍을 두르고 있다. 크게 똬리를 틀며 한강을 굽어본다.
도봉산과 북한산은 우이령(소귀고개)길로 갈라진다. 고개 북쪽이 도봉산이고 남쪽이 북한산이다. 우이령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양주시 교현리를 잇는 길이기도 하다. 1968년 1·21사태 때 북한군 김신조가 넘어왔던 길로 유명하다. 그 이후 41년 만인 지난해 문이 열렸다. 가곡 ‘바위고개’(이흥렬·1907∼1980·작사 작곡)의 배경이기도 하다.
도봉산둘레길이 곧 열린다. 거리는 약 26km. 지난해 북한산둘레길(44km)에 이어 완결판이다. 5월 말 완공 예정이지만, 6월로 늦춰질 수도 있다. 이미 공사가 마무리된 곳도 있고, 미처 손대지 못한 구간도 있다. 말이 도봉산둘레길이지 정식 이름은 어디까지나 북한산둘레길(도봉산 구간)’이다. 도봉산길도 크게 보면 북한산국립공원 둘레길에 포함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요즘 도봉산둘레길은 막바지 공사에 한창이다. 안내표시판이 갖춰지지 않은 곳도 있다. 꼼꼼하게 제대로 가려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지도는 기본이다. 주요 포인트를 정해 길을 물어 가는 게 낫다. 재미가 쏠쏠하다. 걷는 보람은 길을 잃어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도봉산둘레길은 아련하다. 봄이 노릇노릇 맛있게 익었다. 연초록 산허리가 희끗희끗하다. 산 벚꽃이 속절없이 지고 있다. 양지바른 곳마다 파란제비꽃이 무리지어 피었다. 노란애기똥풀꽃도 흐드러졌다.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연산군 묘 쪽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저 멀리 도봉산 오봉의 매끈한 몸매가 보인다. 잔솔밭을 따라가다 보면 금세 연산군 묘에 다다른다. 연산군 묘는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있다. 아파트에 위리안치(圍籬安置)돼 있다. 위리안치란 ‘가시울타리 친 집안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형벌’을 말한다. 연산군이 강화 교동도로 유배됐을 때도 위리안치를 당했다.
연산군 묘와 아파트 사이엔 830년 넘은 은행나무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높이 24m, 둘레 9.6m. 풍채가 당당하다. 곱게 잘도 늙었다. 서울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 은행나무’다. 연산군이 이곳에 묻혔을 때도 묵묵히 지켜봤을 것이다. 연산군 묘의 수호신 같다. 연산군 묘에서 무수골까지는 둘레길 단장이 한창이다. 연분홍 산복사꽃이 화사하다. 밭두렁엔 조팝나무 하얀 꽃이 다발로 피었다. 길 아래 자동차소리와 숲속의 새소리가 수시로 버무려져 들린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배한봉의 ‘복사꽃 아래 천년’에서
도봉탐방지원센터를 거쳐 북한산국립공원도봉사무소∼망월탐방지원센터∼회룡탐방지원센터로 휘돌아간다. 문득 언젠가부터 오봉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갗이 햇살에 살짝 데쳐졌다. 계곡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시원하다. 산자락 나뭇잎들은 제법 짙푸르다. 그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연초록으로 옅어진다. 맨얼굴의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이 우람하다. 뼈마디 굵은 북사면이 손에 잡힐 듯 드러난다.
회룡탐방지원센터∼안골계곡∼원각사∼오봉탐방지원센터 길은 사패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의정부 쪽에서 양주로 길게 휘돌아 가는 길이다. 아예 회룡탐방지원센터에서 회룡능선을 타고 곧바로 송추 방향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둘레길 코스는 아니지만 좀 더 가까운 길이다. 두 코스 모두 험하지 않다. 쉬엄쉬엄 가다 보면 어느새 산잔등에 오르게 된다. 발아래가 양주 송추계곡이다. 해는 계란 노른자처럼 서산에 걸려 있다. 뎅! 데엥! 범종소리가 아득하다. ‘울리다, 적시다, 덮어주다, 쓰다듬다, 재우다 같은 동사를 앞세우며 간다.//낮다, 길다, 무겁다, 둥글다, 느리다, 너그럽다 같은 형용사들이 뒤따라간다.//…//지이잉-징 기일게 울다가 터어엉-텅 속을 비우며 운다’
-김선태의 ‘저녁 범종소리’에서
■ 연산군과 부인 신씨 무덤 파란만장했던 그, 아내곁에 고요히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1476∼1506년)의 무덤은 평범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 한양의 평범한 양반가 무덤 정도나 될까. 왕릉에서 흔히 보이는 각종 동물석상(말, 양, 호랑이)이나 십이지신상, 무덤병풍석이 없다. 묘비명도 그냥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이다. 그의 동갑내기 부인 신씨(1476∼1537년)도 바로 왼쪽에 누워있다. 역시 비석엔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세월에 닳고 닳아 손가락으로 만져봐야 헤아릴 수 있다. 그들은 1488년 겨우 열두 살 때 혼인했다. 부부 이전에 ‘어릴 적 같이 놀던 소꿉동무’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비, 임금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왕의 아들딸과 왕의 후궁이 묻힌 곳이다. 연산군은 한때 왕이었지만 폐위됐으므로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년)의 첫째 아들로 대우한 것이다.
연산군은 12년 동안 임금 자리(1494∼1506년)에 있었다. 탈도, 말도 많았다.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날마다 잔치를 벌여 ‘흥청망청’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성균관은 유흥장이 됐고,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던 사간원과 홍문관은 폐쇄됐다. 오죽하면 연산군 앞에서 줄을 타던 광대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비아냥댔을까.
연산군은 여리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내로라하는 영화배우들이 너도나도 그 역을 맡았던 이유일 것이다. 신영균 이대근 임영규 유인촌 유동근 노영국 정진영 정태우…. 정치와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중종·1488∼1544)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연산군은 동생을 전혀 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임금이라면 일찌감치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연산군은 시인 쪽에 더 가까웠다. 실제 그가 지은 시가 130여 편이나 전해진다. ‘용렬한 자질로 임금 자리에 앉은 지 10년이 되었건만/너그러운 정사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나’ (갑자사화 나던 1504년 3월)
‘너무 애달파 눈물 거두기 어렵고/슬픔이 깊으니 잠조차 오지 않네/마음이 어지러워 애끊는 듯하니/이로해서 생명이 상할 줄 깨닫네’ (1505년 9월) 연산군의 광기는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랐다.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오직 후덕한 신씨만이 그를 눈물로 달랬다. 연산군은 신씨의 말만은 다소곳이 들었다. 하지만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1506년 9월 연산군은 강화 교동도로 위리안치됐다. 집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집 밖으로 나가봐야 바다가 가로막고 있을 터였다. 교동도는 강화섬 옆구리에 붙은 외딴섬인 것이다. 강화섬에서 배로 15분쯤 걸린다.
연산군은 뛰다 죽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기질에 피 끓는 나이 서른. 호리호리한 몸매에 갸름하고 곱상한 얼굴. 춤 잘 추는 하얀 피부의 꽃미남. 그림과 글씨를 좋아했던 임금. 결국 그는 두 달 만에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신씨가 보고 싶다”며 죽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
연산군 부인 신씨는 살아남았다. 한양 밖으로 쫓겨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신씨의 어질고 착한 성격 덕분이었다. 쿠데타세력은 신씨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도 ‘군부인(君婦人)’으로 강등됐는데도 ‘빈(嬪)’이라고 부르며 왕세자부인 대우를 해줬다. 1513년 신씨는 중종에게 간청하여 연산군의 묘를 지금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537년 신씨는 눈을 감았다. 연산군보다 31년이나 더 살다가 그의 곁에 묻혔다. 고단한 세월이었다.
김화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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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입구 강북공영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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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지하철 7호선 노원역에서 1144번 버스→우이동입구 하차
양주 교현탐방지원센터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34, 704번 버스→교현리 우이령입구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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