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정말 책이 사람을 골랐다. 한복 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아티스트인 이효재의 서재엔 허영만의 만화 ‘짜장면’이, 바이올리니스트 조윤범의 서재엔 사진가들의 이야기 ‘클라시커 50 사진가’가, 서울대 로스쿨 교수 조국의 서재엔 1027쪽에 달하는 ‘The left’가 꽂혀 있다. 헤이리 촌장 이안수, 북디자이너 정병규,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 등 열다섯 명의 삶과 서재 이야기가 마치 15권의 책이 꽂힌 한 칸의 서재처럼 책 한 권에 담겼다. 신간 ‘지식인의 서재’다.
책을 펼치자 장마다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15명의 서재 사진이 눈을 끈다. 클래식 CD와 DVD가 잔뜩 꽂힌 음악가의 서재, 전통문양의 나무 여닫이문이 달린 골방을 가득 채운 전통예술인의 서재, 형형색색의 만화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보자기 아티스트의 서재,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라는 괴테의 글이 쓰인 법학자의 서재. 책도 서재도, 사람도 제각각이었다.
“말은 지나가지만, 글은 밤하늘의 별처럼 박히는 거잖아요.” 이효재의 말. 그의 서재엔 ‘열혈강호’, ‘캔디캔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천재 유교수의 생활’ 등 만화책만 수천 권이다. 만화를 통해 기발한 상상력을 배운다는 그에게 만화책은 ‘화살처럼 꽂히는 무언가’다. 책을 분류할 때도 만화책이냐, 아니냐로 분류한다. 한 번 살 때는 트렁크 캐리어를 들고 가서 한 가득 사온다. 애도 아니고 왜 이토록 만화책을 좋아할까. 만화나 동화를 볼 때면 ‘국물을 마신 것처럼 개운해진다’는 것이 이유다. 추천도서 목록에 직접 서평도 썼다. “지금 읽어도 젊었을 때 봤을 때와 또 다르게 감동스러워요. 내용이 너무 훌륭하잖아요.” 역시나, 만화책 ‘캔디캔디’를 추천했다.
예술마을 촌장 이안수의 게스트하우스 서재. 모닥불에 4년 치 일기장을 태우고 싶다던 젊은 여자 객은 한 장의 쪽지를 남기고 다음 날 아침 사라졌다. “제 일기장을 이곳에 두고 갑니다. 서재 어딘가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았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힘이 될지도….” 어떤 이는 숙박료 대신 책을 보내온다. 이안수에게 명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하게 될 낯선 이의 일기장, 누군가의 손때 묻은 책 한 권으로 그의 서재는 채워진다. 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그는 추천도서 목록에 둘째 딸의 서평을 실었다. “수능 보기 전에 읽은 책. 이스마엘 베아의 삶을 안 후부터 나에겐 더 이상 수능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소년병이 전쟁의 참상을 겪는 과정을 그린 소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 인권, 자유, 투쟁을 말하는 추천도서 목록. 조국 교수의 서재다. “모든 인간은 껍질과 벽이 있어요. 이를 깰 때에만 소통이 되고 변화가 되며 생존이 가능하죠. 다른 사람의 글, 책을 볼 때 껍질이 비로소 부드러워집니다.” 그의 서재엔 개혁을 논하는 좌파 도서뿐 아니라 시집도 많았다. 책 지식인의 서재는 이처럼 명사의 ‘의외’의 모습과 진솔한 이야기가 많다. 직접 쓴 서평도 참신하다. 다만 인물을 논할 때 저자가 좀 더 담담하게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 “법학자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에 맞서 싸우고…시민운동과 인권운동을 통해…도회적인 외모 안에…푸근한 정서가 있고…이목을 잡아끄는 매력이….” 거의 한 문단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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