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찬 - 이한순 - 이현종 씨 등 5명 7개월 작업 마무리
숫자-약물 - 기호 포함 4000여 자 일일이 붓으로 써
《흰 종이에 먹이 검은 길을 낸다. 힘차게 출발한 획은 끝에 가서 가늘어지며 살짝 올라간다. 가로획이 미소 짓는 입 꼬리를 닮았다 하여 ‘미소체’라 불리는 서체. 서예가 현병찬 씨의 글씨다. 50년 넘게 글씨의 길을 걸어온 ‘한곬 선생’의 육필(肉筆)이 그대로 컴퓨터 글씨에 담겼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회장 박종국)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서체를 컴퓨터 글씨로 선보였다. 2004년 1차로 원로 작가 5인(원곡 김기승, 일중 김충현, 평보 서희환, 갈물 이철경, 꽃들 이미경)의 글씨를 디지털 서체로 개발한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이번에는 아람 이한순, 의당 이현종, 규당 조종숙. 한곬 현병찬, 난정 이지연 씨의 글씨를 디지털로 옮겼다.》
“지금까지 컴퓨터 자판에 있는 글씨는 대부분 도안 작업으로 만든 것이었죠. 아름답긴 하지만 기계로 만들어 손맛이 없다고나 할까요. 이번 미소체에는 ‘비백’(서예에서 획 중간에 비어있는 공간)과 ‘잠식’(蠶食·누에가 뽕나무를 갉아 먹듯이 획의 부분 부분이 붓의 결로 인해 자연스레 비는 모양)이 그대로 살아났어요. 육필 맛을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현병찬 씨의 설명이다.
이번에 새로 개발된 디지털 서체는 서예가 5명이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그려 만들었다. 자음 모음과 약물, 기호 등 4000여 자를 붓으로 하나씩 그려야 했기 때문에 지난해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꼬박 7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차재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상무이사는 “육필 그대로의 맛을 살렸기 때문에 좀 더 정감 있고 친근하고 인간적인 글씨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5개의 서체가 갖는 개성도 확연하다. 현병찬 씨의 글씨는 훈민정음 서체의 원필에 근거한 판본서체이지만 가늘거나 굵은 선으로 가로획에 변화를 줘 조형미를 살렸다. 이지연 씨의 글씨는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안으로는 강한 힘이 느껴지는 궁체다. 조종숙 씨의 경우 궁체와 판본체를 접목한 새로운 서체로, 내리긋는 획을 조금 통통하게 그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이현종 씨의 글씨는 궁체의 정자체로서 자모음의 짜임새가 돋보이고, 이한순 씨는 약간 흘려 쓴 궁체 반흘림체로 글씨와 글씨 사이의 연결을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멋스러우며 단정하다.
오랜 시간 동안 붓글씨에 매달려온 서예가들이지만 어려움도 컸다. “지금까지는 문장 위주로 썼는데 이번에는 낱말과의 씨름이었어요. 평소에 잘 안 쓰는 낱말들도 많이 나와 그 멋을 살리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글자 수가 4000자이지만 실제 쓴 건 만 자가 넘습니다.” 현 씨는 이 때문에 하루에 너덧 시간씩 붓을 잡았다고 했다.
수작업의 어려움에도 서체 개발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인쇄기를 처음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여올 때 일본이 제작한 한글 자모까지 구입해야 했다고 차 이사는 말한다. “국가적인 자존심의 문제였습니다. 내 나라 내 글자를 우리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글 글자본 제정기준안을 만들었죠. 그때 처음으로 만들었던 서체가 ‘한글문화바탕체’였습니다.”
이번 서체 개발은 5월 15일 세종의 날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5개의 서체를 컴퓨터에 설치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한 CD와 자음 순서대로 서체 원본을 수록한 ‘현대 한국 대표서예가 한글 글씨본’(전 5권)도 펴내 곧 판매에 들어갈 예정이다. 차 이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아름다운 서체를 누구나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세종의 창제 정신을 글꼴에 담아 만들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31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서체 보고회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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