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구통계에 따르면 2007년 5월 23일 기준으로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 이 같은 ‘지구도시화’는 고대 도시로부터 비롯된 인류 문명의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하나도 도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짓지 않고는 올바로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
현대인은 도시에서 살아간다. 최근 수백 년간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은 대부분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책은 도시를 역사 연구의 중심에 놓고 각 도시가 어떤 길을 밟아왔는지 들여다본다. 서울, 도쿄, 베이징, 오사카, 상하이, 런던, 파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카고 등이다. 각 도시의 기원, 성장과정, 공간 구조, 사회 갈등 등을 쉽게 풀이했다.
도시가 현재와 같은 위치에 오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역사가 오래된 런던도 본격적으로 도시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이고 급속한 팽창을 이루며 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건 19세기부터다.
서울 역시 본격적으로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다. 농경중심사회에서 상업적 도시로 변화가 시작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은 일제강점기 때 제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6·25전쟁 이후 가속화됐다. 주택공급, 교통, 쓰레기 등 각종 문제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서울은 강북 구도심을 벗어난 주변부 신시가지 건설을 시작했다. 한강 수변의 저습지였던 ‘강남’은 새로운 서울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강남은) ‘양식(洋式)’ 아파트 건물과 소달구지가 논두렁을 경계로 공존하는 ‘비동시대적’ 풍경을 거쳐 어느덧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양산하는 ‘한강의 기적’의 현장이 됐다.” 아파트가 빽빽한 서울의 풍경은 이때 결정된 셈이다.
일제강점이나 전쟁 등 외부적 요인에 영향 받아 변화했던 서울과 달리 일본의 수도 도쿄는 일왕이 거처를 옮기는 ‘전략적 천도’를 통해 수도로서의 면모를 공고히 했다. 도쿄는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황거(皇居)를 중심으로 주변에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 주요 관청이 배치돼 있다. 의도적인 공간 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하고 황거를 중심으로 관청을 배치해 공간을 새롭게 구성한 것은 이후 일왕의 신격화와 일본 특유의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상징한다. 도쿄는 이처럼 특정한 목적을 갖고 상징적, 행정적 수도로 재탄생한 도시였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은 베이징이 겪어온 역사적 정치적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본래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이었던 톈안먼 광장은 청대 말 제한적으로 일반에 개방되기 시작했다. 1913년 중국 최초의 공화제 정부 성립 집회가 톈안먼 광장에서 열렸다. 1919년 5·4운동이 촉발되고 1989년 톈안먼 사건이 벌어진 곳도 같은 장소였다. 황제의 공간이 시민의 공간으로 변해온 과정은 중국의 역사적 변화를 나란히 반영한다. “베이징의 면모는 전통적인 일상 공간과 새로운 정치 공간이 중층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창안됐고, 향후 도시 문화의 변용도 이러한 공간 구성이 어떻게 재편되는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책은 말한다.
“시카고의 ‘미국적인’ 특성은 급성장에서 비롯된다. 미국 자체가, 인류사의 여정에서 따져 보자면 그야말로 급성장한 국가 아닌가?”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 유명한 도시가 수없이 많은 미국에서도 굳이 미국 대표 도시로 시카고를 꼽은 이유다. 시카고는 뉴욕 같은 오래된 도시의 느낌이 없는, 완벽한 신도시였다. 미국 특유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1833년 건설 이후 1840년에서 1890년까지 인구가 200배 이상 증가했다. 1871년 대화재를 겪은 뒤 오히려 더 화려하게 부활해 지금도 현대건축과 도시계획의 메카로 꼽히고 있다.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로 구성된 노동자, 20세기 초 대이동해온 흑인 등 이질적인 집단이 어울려 갈등을 겪었고 알 카포네로 상징되는 조직폭력배가 기승을 부렸던 사실 역시 시카고의 미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면모의 일부다. 지금은 대통령 오바마를 낳은 도시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 외에도 서울과 경쟁하며 동북아 중심 도시로 주목받고 있는 일본 오사카와 중국 상하이, 러시아 문화의 정수를 담은 도시이자 레닌의 도시로 복합적 면모를 지닌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장벽부터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까지 역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베를린, 한때 ‘도시가 아니라 세계’로 불렸고 현재는 새로운 도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파리에도 책은 주목한다. 각 도시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나 깊이 있는 분석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도시를 역사의 중심에 놓는다는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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