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너 뮐러의 연극, 꽤 독하다. 배우들은 A4 한 장씩은 족히 넘을 대사들을 읊어댄다. 그것도 서로 주고받는 대사라기보다는 독백이나 방백에 가깝다. 그게 꽤 시적이다. 상징과 은유가 넘쳐 오랫동안 음미할 만한 요소가 많다는 의미도 된다.
“세상의 시계를 멈추게 하는 것, 그건 바로 지속되는 발기의 영원성이죠. 시간은 전 인류가 들어갈 만한 엄청나게 큰 창조의 구멍입니다. 교회는 천한 것들에게 신으로 그 구멍을 막아 줬지요. 우리는 그 구멍이 캄캄하고 밑바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건 탄트라 밀교의 잠언을 연상시킨다.
“제가 두려워하는 건 상투적인 밤이에요. 내 가족들에게나 어울리는 진흙구덩이 속으로 날 처박는 거지, 가족이란 우연하게 만나 서로 자물쇠로 잠가 버린 감옥이죠. 거기엔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이 살고 있어요.”
이건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브레히트 이후 독일 최고 극작가로 꼽히는 뮐러가 냉전의 절정기였던 1981년 발표한 연극 ‘사중주’에는 이런 상징적 대사가 철철 넘친다. 그렇다고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이야기 자체는 통속극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년)의 원작인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1782년)다.
천하의 바람둥이 커플인 메르퇴유 후작부인과 발몽 자작이 순진한 영혼들을 사랑의 유희로 농락하다가 자신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파멸한다는 내용이다.
연극은 이 익숙한 이야기를 3차대전 직후 어쩌면 유일한 생존자일지 모를 두 남녀의 연극놀이로 펼쳐낸다. 여자(배보람)는 메르퇴유 후작부인이 되고 남자(윤정섭)는 발몽이 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성(姓)을 바꿔가며 역할극을 펼친다. 메르퇴유는 발몽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젊은 조카딸 세실이 되기도 한다. 발몽 역시 자신이 사냥감으로 점찍은 정숙한 투르벨 부인으로 변신해 메르퇴유가 연기하는 자신과 대결한다.
제목인 ‘사중주’는 한 남자(발몽)와 세 여자(메르퇴유, 투르벨, 세실)로 이뤄진 4개 캐릭터의 합주란 뜻이다. 하지만 실제론 2인극이므로 사중주 같은 이중주다.
연희단거리패의 차세대를 대표하는 두 젊은 배우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다. 동아연극상 신인상 최연소 수상자인 배보람 씨는 연기인생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메르퇴유를 연기할 때는 그리스 비극의 최대 악녀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발몽으로 변신하면 프랑스 희극 속 피에로 같은 연기로 웃음을 자아낸다. 윤정섭 씨 역시 미소마다 송곳니를 드러내는 사냥꾼(발몽)의 냉소와 그 송곳니에 물려 자신의 핏줄을 열고 마는 제물(투르벨 부인)의 절망이라는 극단의 감정을 하나의 몸에 실어낸다.
인간의 악마성을 탐구해온 연출가 채윤일 씨는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을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적 텍스트로 읽기를 멈춘다. 대신 애욕(에로스)과 파괴본능(타나토스)의 거미줄에 묶인 인간 존재에 대한 야유로 읽어낸다. 메르퇴유 부인과 발몽은 여성과 남성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애욕의 거울 앞에 선 쌍둥이다. 인류 멸종의 위기에서조차 그 둘이 넷이라는 증식의 길이 아니라 하나 또는 무(無)라는 소멸의 길을 택하는 본질적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한없이 슬픈 사중주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서울 종로구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브레히트±하이너 뮐러 기획전 세 번째 작품. 6월 5일까지. 2만∼2만5000원. 02-763-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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