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16>이해욱 전 KT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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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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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시 앞바다 섬에 거주하는 소녀들의 환영 무용. 머리에 꽂은 붉은 꽃만큼이나 소녀들의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푸아뉴기니. 2008. 이해욱 촬영
마당 시 앞바다 섬에 거주하는 소녀들의 환영 무용. 머리에 꽂은 붉은 꽃만큼이나 소녀들의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푸아뉴기니. 2008. 이해욱 촬영


이해욱 전 KT 사장
이해욱 전 KT 사장
고2 때부터 영어에 매달렸다. 대입이 점점 다가와도 영어만 파고드는 그를 보고 친구들은 ‘미친 놈’이라고 놀렸다. 목적은 오직 하나. 해외 유학을 가기 위한 것. 하지만 그 이듬해 정부가 유학 자격을 대학생으로 높이는 바람에 꿈을 미뤄야 했다. 당시 그에게 유학이란 ‘외국에 공부하러 가기’였지만 미지의 세상 저편을 보고 싶은 소년의 간절한 꿈이 포함되었기에 너무나 아쉽고 원통했다.

소년은 출세를 한 뒤 유학을 가는 쪽으로 맘을 바꿨다. 출세의 도구는 공부.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진학했고 대학 시절에는 매일 도시락 2개씩 싸들고 도서관에 처박혔다. 마침내 1964년 제1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됐다. 일반인은 해외에 나가기 어려웠던 시절, 공무로 해외 출장이 잦았다. 덕택에 은퇴 전까지 40개국을 다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론 ‘유학을 꿈꾸던 소년’의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2% 부족했다. 1993년 은퇴 두 달 뒤부터 아내와 약속한 배낭여행에 나섰다. 은퇴 후 몇 가지 직함을 가졌지만 더 이상 ‘자리’에 대한 미련도 끊었다.

“권력과 돈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삶이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먼저 커리어적인 성공, 가족의 행복과 같은 가치를 잘 지켜냈다면 제2의 인생에서는 온전히 나를 위해 열정을 바치는 시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주인공은 이해욱 전 KT 사장(73)이다.

그는 2010년 10월 국가기록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전 세계 독립국가 192개국(정부가 여행을 금지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는 제외)을 여행한 기록인증을 받았다. 이는 12년에 걸쳐 세계 일주를 한 여행가 고 김찬삼 교수의 160여 개국보다도 많은 숫자다. 그런 그가 2009년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사진전. 전문가의 사진은 아니지만 사진으로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렸다. 서울지하철 강남역 부근 그의 사무실에서 여행과 사진에 얽힌 인생 역정을 들어 봤다.

몹티 시를 관통하는 니제르 강변에서 플라니족 여인들이 노천시장에서 박을 고르고 있다. 말리.2008
몹티 시를 관통하는 니제르 강변에서 플라니족 여인들이 노천시장에서 박을 고르고 있다. 말리.2008


-우선 192개국 여행 기록인증을 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처음엔 세계 일주를 하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고 아내와 약속한 여행을 실천했을 뿐이지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와 위험이 따랐어요.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대륙만 남겼을 때 세계 일주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아프리카를 혼자 가기에는, 특히 중서부 지역은 너무 위험한 나라가 많아 망설였습니다. 인터넷으로 일본에 있는 오지여행 전문 여행사를 찾아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험하다며 아이들이 만류했어요. 결국 그동안 동행했던 아내는 남겨 놓고 저 혼자서 일본 여행객과 다니면서 무사히 세계 일주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행 관련 사진자료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쉬워요. 공무원 시절에는 출장을 다녀도 명승지에서 기념사진 정도만 찍었고요. 여러 동료와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그중에서 찍어 주는 쪽보다 찍히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념촬영 수준의 사진만 남아 있어요. 게다가 은퇴 후 여행에선 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를 동시에 하다 보니 사진을 더 많이 찍지는 못했죠. 비디오는 메모로는 부족한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더 아쉬운 것은 2005년 집수리를 하면서 이전에 찍은 사진 중 많은 부분을 버리고 말았어요.”

-늦게라도 제대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마지막 여행지인 아프리카 대륙을 남겨둔 2005년부터입니다. 아프리카는 ‘한 번 가면 다시 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DSLR 카메라를 사서 제대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6년 정도 됐죠. 여행 초에는 ‘사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사진의 로망이다. 삼수갑산을 다 다니면서 사진을 왜 그렇게 허술하게 생각하느냐. 가서 찍어 놓으면 나중에 뭘 하든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친구들의 조언을 무시했어요. 지나고 보니까 책을 쓰든 전시회를 하든 사진은 효용 가치가 높았어요. 무겁더라도 진작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닐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사진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현장에서 찍으면서 배웠어요. 잘 아시겠지만 단체여행의 경우, 카메라 자동모드로 기념사진만 톡 찍고 떠나니까 제대로 사진 찍을 틈이 나지 않아요. 제 나름의 풍물을 찍을라치면 딴 분들은 이미 사진 다 찍고 다 나만 쳐다봐요. 가자는 것이죠. 단체여행에서 사진가는 골치 아픈 존재예요. 차로 여행 중에 별안간에 여기 서라 그러죠. 한 번만 그러면 좋은데 번번이 그러니깐 ‘여기 너 혼자 왔냐. 사진 찍으려면 나중에 여행을 따로 다니든지 할 것이지….’ 이렇게 되고 말아요. 제가 찍은 사진들은 다 그런 중에 찍은 것들입니다. 사진이나 글을 위한 여행과 관광여행은 또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사진 찍는 분들과도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확실히 여유가 있더군요.”

-여행사진을 찍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면….


“저 같은 경우는 그 지역과 관련된 좋은 사진집이나 인터넷을 통해 대표적인 풍광이나 유적지를 미리 보고 자료로 정리해 두는 것이 기본입니다. 여행 중 희귀한 풍경을 만나면 돈을 주고서라도 제대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 확실히 돋보이는 사진을 찍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돈 대신 볼펜이나 머리장식 같은 선물을 준비해요. 돈을 줘 버릇하면 그 사람들의 심성을 버리잖아요. 딴 얘기지만 오지일수록 큰 카메라가 유리해요. 카메라가 클수록 사진이 좋게 찍힌다고 생각해 저항감이 적거든요.”

-여행에서 주로 관심을 두는 사진 소재가 있다면….


“여행사진은 주로 풍경과 인물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시장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시장이 제일 우범지대예요.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들치기나 불량배가 많아요. 현지 가이드가 아예 시장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보게 하고 바로 차로 지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저는 여행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용기를 내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어요. 찍지 말라고 소리 지르거나 위협을 하기도 해요. 나중에 보니 그렇게 어렵게라도 찍길 잘했다 싶었어요. 아프리카인의 이색적인 얼굴 모습이나 자연 소재의 의상을 입은 모습이 너무나 생동감 있잖아요.”

-그렇게 사진에 저항감을 갖는 나라가 많나요.


“선진국은 대체로 문제가 없는 편이에요. 반면에 일부 아프리카와 중동 쪽 이슬람 국가는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아프리카는 무슬림도 많은 데다 사진을 찍으려면 애들이 달려들어 돈 달라고 해 그게 힘들어요.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은 사진 찍으면 아직도 혼을 뺏긴다고 생각해 근본적으로 거부감을 보여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사진 찍기는 찍은 사진만큼이나 여행의 추억으로 남아요.”

-세계에서 사진 찍기 좋은 나라를 꼽으라면….


“저는 파푸아뉴기니를 추천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원시적인 복장과 얼굴에다 그 삶 자체가 문화하고 동떨어진 인류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진에 대한 저항감이 없어요. 사진을 찍으면 자신의 친구나 옆에 있는 사람도 찍어 달라고 해요. 그러고 궁핍한 모습도 기꺼이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요. 아마 사람들이 그런 교육을 받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나라도 관광객이 많이 와야지만 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거든요.”

-사진과 관련 없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나라는….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현재 프랑스령인 타히티 섬이 인상적이었어요. 고갱의 섬이기도 하죠.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꼽히는데 경치도 좋고 역사적인 유적도 있고 유명한 영화 촬영지도 많아요. 게다가 먹을거리도 괜찮아요.”

-카메라는 언제 장만하셨나요.


“이전에는 필름카메라를 사용하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딸이 쓰던 콤팩트형 카메라를 사용했죠. 그러다가 아프리카 여행을 앞둔 2005년 캐논 40D를 구입했어요. 사진은 다 컴퓨터에 저장을 해두는데 초창기 디카는 화소수가 적어 지금 활용하기엔 질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성능 좋은 DSLR 카메라를 욕심내고 있는데 지금 맘에 두고 있는 캐논 5D Mark 2를 사야 할지 신제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아프리카 일주 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아프리카로 한 번, 중남미 아이티로 한 번 전시회를 했는데 아프리카 사진은 병원과 지방순회도 했어요. 친구들 얘기가 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사진전을 한다는 것이 사진전문가에게는 상당히 용감하게 보일지 모른다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심도 있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여행을 다니면서 신기했거나 교감 받은 걸 찍어서 ‘나는 이런 것을 봤습니다’ 하고 보여주는 것이니 너그럽게 봐주시리라 믿어요. 큰 병원 복도에서 전시를 할 때였어요. 환자복을 입은 분들이 제 작품을 유심히 볼 때는 제 마음도 흐뭇해지더군요. 언제 또 사진전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때에 대비해 더 심도 있는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구촌을 둘러본 소감은….

“정말 ‘지구촌이 맞다’는 느낌입니다. 소감이 너무 단순한가요. 차 대신 말을 타고, 쇠고기 대신 양고기를 먹고 움막이든 아파트든 집을 짓고 사는 인간의 의식주는 같았어요.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요. 지구촌은 사랑하고 싸우고 자식 낳고 키우고 하는 똑같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었어요.”

그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의 여행이 지역 완성주의라면 앞으로는 한 번 갔더라도 미처 시선이 닿지 않았던 곳이나 보다 의미를 내포하는 곳을 찾는 세밀한 여행이 될 것 같아요. 독립국가는 아니지만 ‘서부 사하라’ 같은 곳이나 극지도 여행해 보고 싶습니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이 마무리되면 다시 떠날 계획입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저는 공감합니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라고 했어요. 이제 저는 그 책을 다시 정독하려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 지구촌 어디를 돌아본들 자신이 살아온 터전만큼 잘 알 수가 있을까. 반면에 인간은 호기심이 충족되면 또 다른 호기심이 생긴다. 이제 꿈 많던 고교생은 노년이 되었지만 꺼지지 않는 호기심의 불꽃은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카메라 멘 유랑’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세계여행에 도움 받기를 원하는 독자는 rheehw@hitel.net으로 연락해 보시길)

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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