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가 진행중이던 1978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위쪽)과 터미널 주의로 백화점 호텔 등이 들어선 현재 모습. 서울역사박물관제공·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찾아간 곳은 지금의 강남구 역삼동 리츠칼튼호텔 인근이었다. 놀다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려 절뚝이는 나를 치료하기 위해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아주머니를 찾아간 것이었다. 지금은 고층 빌딩들이 빼곡하지만 그때만 해도 집을 짓기 위해 평평하게 닦아 놓기만 한 빈터가 많았고 골목에는 흙먼지가 날렸다. 벽돌로 지은 단독주택만 듬성듬성 서 있는 가운데 아주머니의 집은 그중 하나인 2층 양옥이었다. 한의사는 아니었지만 아주머니에게 침을 맞고 효과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 그분에게 침을 맞기 위해선 서너 달씩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과의 친분 덕분에 일종의 ‘특진’을 받을 수 있었다.
다리에 수십 개의 침을 꽂고 뜸 뜬 자리에서 퍼져 나오는 쑥 향을 맡으며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대화를 나눴다.
“나는 정말 다른 욕심 하나도 없는데, 집 욕심만은 못 버리겠어. 너도 한 번 해봐. 큰돈 벌 수 있어.”
“난 용기가 없어서, 돈도 없고….”
“돈은 빌리면 돼. 요즘은 강남에서 아무 집이나 사면 무조건 벌게 돼 있어.”
“그건 그렇긴 한데….”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권했던 것은 요즘말로는 ‘투자’, 옛날 말로는 ‘투기’였다. 실제로 아주머니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많이 모았다고 했다.
올해 41세가 된 기자에게, 서울의 ‘강남’ 하면 처음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날 어른들의 대화가 압축하고 있다.
○ 중년에게 강남이란…
30, 40대에 접어든 중년들에게 서울의 강남은 이처럼 치열한 삶의 전투를 잠시 중단하고 되돌아보면서 회상에 잠길 만한 소재다. 강남, 서초, 송파구를 가리키는 서울의 강남만큼 급격한 물리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곳은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그 변화는 중·장년층이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짧은 기간에 진행됐다.
서울시와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지금의 강남은 당초 서울이 아니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강북 지역)에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한강인도교와 광진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남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단절돼 있었다. 당시 강남은 서울 근교지역으로 분류됐으며 논, 채소밭과 과수원이 많았다.
강남이 사람들의 관심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가 개통된 1969년
12월이었다. 1917년 준공된 한강대교, 1965년 놓인 제2한강교(양화대교)에 이어 제3한강교가 놓이고, 이어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도 개통되자 강남으로 이동이 수월해졌고 이때부터 강남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강남 개발이 필요했던 이유는 급속한 산업화로 서울 강북지역이 과밀화되자 서울 인구를 수용할 가까운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남서울 계획’, ‘새서울백지계획’ 등 강남 개발 계획을 잇달아 내놨으나 강남 개발이 본격화한 것은 1968년이었다. ‘영동지구 구획 정리사업’에 따라 길을 직각으로 크고 반듯하게 낸 뒤 공원, 학교용지, 주택용지 등으로 토지의 용도를 정하면서부터였으며 한남대교,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속도가 붙은 것이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이었다. 강남은 이처럼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저 ‘영등포의 동쪽 땅’이었으나 이때부터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구획정리사업에 따라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빈터가 드러났다. 정부는 빈 공간을 하루빨리 채우기 위해 강북지역의 추가 개발을 억제하며 다양한 강남 개발 촉진책을 내놨다. 허허벌판에 공무원아파트를 세우는 한편 학교, 고속버스터미널, 공공기관을 이전하고 민간 업체들에도 세금 감면 등 다양한 혜택을 줬다.
○ 강남 룸살롱과 8학군의 공통점
지금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당시 회사별로 따로 운영하던 강북의 버스터미널을 1981년 한곳에 모은 것이다. 경기고, 휘문중고교, 숙명여중고, 서울고등학교 등도 1976∼1988년 순차적으로 강남으로 이전해 ‘강남 8학군’을 형성했다. 한편 개인주택만으로는 서울인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울시가 1975년 아파트만 지을 수 있는 아파트 지구를 지정함에 따라 지금의 압구정, 반포, 청담, 도곡동 아파트촌이 생겨났다.
눈에 띄는 강남 촉진책 중 하나는 1972년 4월 서울시가 내놓은 강북 억제 정책인 ‘특정시설 제한구역’ 설정이다. 서울시 시책에 따라 강북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설이 금지됐으며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도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중구 다동, 무교동 일대에 즐비했던 유흥업소들도 서울시 조치로 타격을 입자 규제 없고 취득세 감면해 주는 강남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기자에게 침을 놔준 아주머니와 같이 사람들이 강남에서 부동산으로 떼돈을 벌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63년 3.3m²당 300∼400원 하던 신사동 일대 땅값은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1970년 1만∼1만5000원으로 뛰었으며 불과 9년 뒤인 1979년에는 40만 원으로 폭등했다.
○ 종부세 때문에? 종부세 덕분에!
1980년 들어서는 대규모 공사장이었던 강남에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일확천금을 노린 투자자들이 강남에 몰리고 그들이 떼돈을 벌면서 강남으로 이전한 유흥업소를 비롯해 고급식당, 호텔 등이 번창했다. 강남 8학군이 명문학군으로 부각되면서 아파트값 상승에도 속도가 붙었다.
1984년에는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이 개통되면서 강남 일대에는 업무시설과 문화시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의 테헤란로와 삼성동, 서초동 일대의 오피스타운으로 진화했다.
주거기능에 자족기능이 더해지자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975년 강남구 신설 당시 32만 명이었던 인구는 1987년 서울 종로, 중구, 용산구 인구 77만 명보다 많은 82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88년 강남구는 강남과 서초구로 나뉘었다.
개발과정에서 부자가 된 사람, 부자가 된 뒤 강남으로 이사 간 사람이 모여 살아 ‘부자동네’의 이름을 얻었지만 집값 상승을 견인한다는 이유로 2005년에는 강남 거주자들을 겨냥한 종합부동산세가 신설되기도 했다. 무거운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생계형 가구가 강남을 떠나는 바람에 종부세 충격을 견딜 수 있는 ‘진정한 부유층’만 강남에 남게 돼 ‘물이 더 좋아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이때 등장한다.
2006년에는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었다는 이유로 정부가 지정한 이른바 ‘버블 세븐’ 지역에 양천, 분당, 평촌, 용인과 함께 강남 3구인 강남, 서초, 송파구가 모두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경기가 하락한 데다 정부의 보금자리 주택 공급으로 강남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빛을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에는 서울 부유층들이 녹지율이 낮은 강남을 떠나 서울 성동구 서울숲 일대의 고급 신축 아파트로 옮겨가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 강남 속 삶은 ‘가상현실’
강남에서 남들이 부자가 돼가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중년. 강남 사람들을 ‘졸부(猝富)’라고 부르며 “관악구도 강남이다”라고 애써 우겨 왔지만 그들에게 강남은 여전히 살고 싶은 땅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한때 새로 산 자동차에 ‘서울 52’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강남 번호판을 달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강남구청에서 차량등록을 했다. 연애시절에는 양재동 패밀리레스토랑이 단골이었고 결혼 전 양가 부모님 상견례 장소로는 삼성동의 호텔을 정했으며 혼수품은 압구정동의 백화점에서 쇼핑했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취직해 월급쟁이가 되고 결혼해 아빠 엄마가 된 그들은 이제 대치동 학원 인근 커피숍에서 자녀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모여 앉아 있다.
그들 중 비강남 거주 중년은 생각한다.
‘우리 애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강남에 집을 살 수 있어야 해.’
강남 거주 중년도 생각한다.
‘우리 애는 열심히 공부해서 강남에 남아야 해.’
갈 수는 있지만 살 수는 없는 곳. 살고는 있지만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는 곳. 고단한 삶에 지친 많은 중년이 강남 속의 삶을 일종의 ‘가상현실’로 받아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