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차 한잔]‘대운하와 중국 상인’ 펴낸 조영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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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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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세기 富쌓은 후이저우상인 그 성장 뒤에는 대운하가 있었다”

“15∼18세기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그건 상업의 발달 때문이었다. 그 상업 발달을 이끈 주역이 안후이(安徽) 성 후이저우(徽州) 출신 상인들이었고, 그들의 성장 배경에 대운하가 자리하고 있다.”

‘대운하와 중국 상인-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민음사)를 펴낸 조영헌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39·사진)는 중국 상인과 대운하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후이저우 상인들은 16세기 안후이 성에서 황허 강과 양쯔 강이 만나는 장쑤 성 북부 ‘회·양’ 지역으로 진출한 뒤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크게 성장했고, 18세기에는 거대한 부를 가진 상인집단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제주에서 표류해 중국을 둘러보고 돌아온 뒤 ‘표해록’을 쓴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溥·1454∼1504)가 1487년 당시 항저우(杭州)에 있던 수많은 상선과 상가를 보고 별천지라며 놀라워할 정도였다.

조 교수는 “후이저우 상인들의 번성을 두고 기존에는 그들의 해박한 유교지식, 관부에 기댄 정경유착, 친인척 중심의 강력한 상호부조 체제 등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그들이 활약했던 공간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대운하와 후이저우 상인은 그렇게 연결됐다. 1600km에 이르는 이 물길은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두 지역을 연결하는 물류 통로로 개설했다. 수도가 바뀌지 않았다면 운하의 중요성도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 중심지 베이징과 경제 중심지 강남 지역을 잇기 위해서는 내륙 수상 운송 네트워크인 대운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또 명·청 시대 바다로의 통행을 금지한 해금정책 때문에 장거리 교역과 물류는 대운하에 집중됐다. 당시 명·청 왕조가 바다 통행을 금지한 이유에 대해서는 왜구의 출몰과 풍랑 등의 위험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 교수도 “중국 왕조가 북방민족을 집중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대운하는 유지와 보수에 큰 돈이 드는 물류 수단이었다. 후이저우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행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운하의 보수비용을 댐으로써 국가 권력의 요구에 부응했다.

대운하는 결정적으로 회·양 지역의 삼대정(三大政)이 원활하게 작동케 하는 핵심 동력이었다. 삼대정은 치수에 해당하는 하공(河工), 국가적 물류인 조운(漕運), 전매사업이었던 소금 유통 즉 염정(鹽政)이 가능하도록 떠받친 핵심시설이었다.

조 교수는 “기존에는 대운하를 단순히 후이저우 상인 발전의 한 가지 요인 정도로만 평가했지만 대운하는 후이저우 상인을 있게 한 핵심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대운하 논의 및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대운하와 관련지어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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